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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할머니래? 우리는 이래 뵈도 ‘흰머리 소녀’

스님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흰머리 소녀․소년이라 부르는 이유

 

 

 

 

차 속에는 자연의 이치가 스며 있습니다.

 

차를 즐기시는 스님은...

 

 

 

머리가 복잡하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찾을 곳이 있으면 좋습니다. 혼자만의  비밀스런 아지트(공간)가 있다면 금상첨화. 찾는 사람이 적고, 조용하며, 공기와 물이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다행이 제게도 힐링 처가 몇 군데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주도 우도 금강사입니다.

 

 

금강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집에 기거하는 즐거움은 대략 세 가지. 첫째, 스님과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것. 둘째, 새벽 예불을 드리며 몸과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는 점. 셋째,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여유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덕해 스님과 차 앞에 앉았습니다. 스님께서 말문을 여시기만 하면 어느 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대화의 집중력이 대단합니다. 이유는 진정성과 해박함 및 부드러움이지 싶습니다. 게다가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마애삼존불>처럼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시면 깜빡 죽습니다.

 

 

“흰머리 소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참 재밌어요.”

 

 

이야기 도중, ‘흰머리 소녀’란 단어에 튀어 나왔습니다. 귀를 의심하면서도 쫑긋했습니다.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흰머리 소녀’란 단어에 호기심이 잔뜩 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단어를 찾았지? 참 멋스럽다, 싶었지요. 대충 ‘할머니’로 해석하는 게 맞을 듯했습니다.

 

 

“스님, 흰머리 소녀란 말이 흥미롭네요. 흰머리 소녀는 누굴 말하나요?”
“….”

 

덕해 스님의 웃음은 자애입니다.

 

 

 

스님은 웃으실 뿐 침묵하셨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안 가르쳐 줘. 궁금해 죽겠지? 알아 맞춰 봐.”

 

라시며 약도 올릴 만합니다. 이마저 없는 걸 보면 선문답을 하자는 건지….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는 건지…. 이미, 본인이 생각하는 흰머리 소녀의 근원으로 들어가신 건지…. 침묵을 깨고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흰머리 소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할머니를 말합니다. ‘흰머리’와 ‘소녀’를 합친 합성어지요. 제가 만들었는데 말을 쓰면 쓸수록 맛깔스러워 계속 쓰게 돼요. 중독성이 있지요. 흰머리 소녀란 말 괜찮죠?”

 

 

듣고 보니 ‘할머니’란 단어보다 ‘흰머리 소녀’가 더 운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사람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고,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국 사라지는 과정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하긴 자연의 이치를 뉘라서 피할 소냐!

 

 

“흰머리 소녀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몇 년 전, 서울서 지하철을 탔어.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할머니들이 단체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대. 생김새와 옷차림을 보니 부잣집 사모님부터 소시민까지 다양한 계층임에도 거리낌 없이 어울려 수다를 떨더라고.

 

각자 성향과 경제력을 떠나 체면조차 벗어던지고 마냥 즐겁게 떠드는 걸 보니 꼭 초등학교 동창 같더라고. 중ㆍ고등학교 동창들은 체면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떠들지 못하거든. 할머니들이 격의 없이 수다 떠는 게 마치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재잘거림처럼 보이더라고. 그래서 나이를 상징하는 흰머리에 해맑은 소녀를 갖다 붙인 거야.”

 

 

딱, 손뼉 쳤습니다. 세심한 관찰력도 관찰력이지만 할머니들의 수다에서 싱그러운 소녀들의 재잘거림을 발견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스님의 풍부한 상상력과 대단한 내공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니까 덕해 스님이 '흰머리 소녀'란 단어를 찾아낸 건 구도자로써 인간에게 갖는 사랑이었던 셈입니다. 천상 스님인, 스님의 맑고 고운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비의 마음은 배움이었습니다.

 

 

덕해 스님이 또 다른 수행 삼아 하시는 서예...

 

 

 

뜨겁던 차가 식어갑니다. 달빛은 점점 깊어갑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는 스님께서 쓰신 붓글씨가 걸려 있습니다. 솜씨가 있는지, 필체에 힘이 서려 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다만,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반가울 뿐이었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자비의 배.”

 

 

이 글귀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르침이었습니다. 만법은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경계를 초월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고통을 넘어 열반으로 가는 자비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었지요. 인간 삶은 고통의 연속. 이를 이겨내고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수행이 있는 것…. 생각을 접고,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님, 흰머리 소녀에 대한 반응은 어때요?”


“반응? 다 늙어빠진 할머니들에게 소녀라고 하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좋아 하지. 할아버지들이 은근 시샘하는 거 있지. 그래 할아버지들은 덤으로 ‘흰머리 소년’이라고 불러.”

 

 

흰머리 소녀와 흰머리 소년. 참 듣기 좋습니다. 이렇게 부른지 3년여가 됐다나요. 하여튼 단어에 의미가 붙으니 더욱 빛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걱정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줄여 말하는 게 대세입니다. 예를 들어, 야간 자율학습을 ‘야자’로 부르는 것처럼 축약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하여, 흰머리 소녀를 ‘흰소’로 부르면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걱정도 팔자라고요? 하긴, 깨달음의 상징인 ‘소’도 괜찮을 듯싶네요. 단지 말 속에 스며있는 의미를 알면 그만.

 

달이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달님이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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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를 반성하며, 50대에는 이런 사람 되게…
오십을 앞두고 내 자신을 부단히 가다듬는 이유
지천명, 50대에는 3가지를 갖춘 사람이 되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가니 생각이 많습니다.

 

 

살다 보니 되고픈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인품과 인성을 지녔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50을 넘긴 지인들을 보며 ‘참 닮고 싶다’ 할 정도로 멋진 중년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저도 내일이면 50세. 이제야 그들처럼 자신만의 인품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천이 중요하겠지요.

 

 

그들은 한 분 한 분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또 다른 지인은 웃는 모습이 너무나 해맑습니다. 또 인자하고 너그럽습니다. 넓은 가슴을 가졌습니다. 조용조용하게 말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낮은 대로 임하며 겸손합니다. 자신을 버릴 줄 압니다. 이런 모습들이 부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분은 자상한데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이겨내고 우뚝 서 빛이 납니다. 항상 공부하고 배우려고 합니다. 예의 바르고 타인을 배려합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열정을 표출합니다. 이런 지인들의 장점 하나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간절합니다.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합니다. 그러나 연말에 속으로 심하게 <오십 앓이>를 했습니다. 원인은 내년에 나이 50. ‘하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이 이렇게 가슴 떨린, ‘~앓이’로 다가올 줄 몰이야!

 

 

50을 앞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알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40대 불혹(不惑)의 삶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반성입니다. 50 넘은 지인들에게 심심찮게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이 50을 넘지 않은 사람은 삶에 대해 논하지 마라.”

 

 

누구나 자기 위치와 나이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음을 아는 대도, 굳이 이를 강조하는 건 <얕음>을 탓하고, <깊이>를 더하라는 진심어린 조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공쌓기가 어디 쉽던가요. 그래서 연륜이 필요한 거죠. 지금껏 제가 살아왔던 기본 마음가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복과 인연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살게 마련이다.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마음 조절은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구도자의 길을 걷고, 심신 수양을 하는 것!”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게 세상 이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살이 참 만만찮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용기, 도전, 분노, 좌절, 체념, 반성, 희망, 노력, 지혜…, 앞에 머무르게 되더군요. 이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곱씹었으나 별 성과 없었습니다.

 

 

살아 온 49년의 삶을 돌이켜 보면, 특히 한 가지가 후회로 남습니다. ‘술’입니다. 풍류를 즐길 줄 몰랐습니다. 뒤늦게 발동 걸리는 습관이 몸에 익어, 기억을 잃은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말. 소위 말하는 주도(酒道)를 간과한 것입니다.

 

 

이 나쁜 습관을 그대로 두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 가차 없이 폐기처분할 생각입니다.

 

 

50되기 전, 나쁜 습관은 고칠 요량으로 지인들에게 “술 줄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어 차례 부끄럽고 기막힌 소리를 들었습니다.

 

 

“술판이 재미없어지는데, 적당히만 마시게. 그럼, 전에 이랬던 기억 나?”
“그런 일이 있었어요?”

 

 

기억이 가물가물. 알게 모르게 입힌 상처가 죄스러웠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뜻하지 않게 마주했던 과거 추악한 ‘나’와의 만남은 부끄러운 반성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술의 노예였던 셈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50대를 맞겠다는 생각 뿐. 40때의 나쁜 기억과 습관에게 작별인사를 고합니다.

 

 

50대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덕 있는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예의와 절차를 지켜 술을 마시며 덕담을 나누던 향음주례(鄕飮酒禮)에 따라야겠다고 다짐 중입니다. 그리고 50대에는 간절하게 이런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첫째,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파!


주장하며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묵묵히 말을 들어주는 건 그 사람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은연 중 위로하는 중에 하나 되는 소통 과정이란 걸 이제야 조금 알겠더군요. 그걸 모르고 냉정하게 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소중함을 명심하겠습니다.

 

 

둘째, 수긍하는 사람이 되고파!


“아~, 그렇구나!”, “너무~, 미안하다!”, “참~, 고맙다!”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동안 혼자만 잘난 체 하는 독불장군, 기고만장, 안하무인이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 헛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성하며 또 반성합니다. 낮은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셋째, 향기 지닌 따뜻한 사람이 되고파!


물질을 욕심내기보다 정신 수양에 열심인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아닌 듯했지만 세상의 노예였습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다”란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울면 같이 울고, 웃으면 함께 웃음 짓는 속에 피어나는 정(情)을 느낄 생각입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살겠습니다.

 

 

이 모든 건 참고, 참고, 또 참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한 걸음부터 떼면 되지 않겠어요. 장장 10년이란 세월이니. 그렇더라도 50대에는 들어주는 사람, 수긍하는 사람, 향기 지닌 따뜻한 사람이 간절히 되고 싶습니다. 주위에서 격려해 주신다면, 힘들어도 힘들지 않겠지요.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참, 닮고 싶은 분이다!”

 

 

지인들을 보며 생각으로만 가졌던 이것을 이제 실천하려고 합니다! 나이 50은 이런 것? 50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새해 복 많이 받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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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빛나는 ‘옷 잘 입는 사람 이야기’
“나이 들수록 깔끔하게 보이는 게 좋다”
삶의 깊이가 부족한 게 누구 탓일까, 마는

 

 

 

 

 저 마네킹처럼 중년의 몸도 근육질이면 좋을 텐데...

 

 

‘옷이 날개’라고 합니다.

옷은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만 치중하다 보면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속은 텅텅 빈 강정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겉과 더불어 내면을 중하게 여기라고 했나 봅니다.

 

 

“아빤 옷이 너무 없어.”


“당신 옷 좀 사야겠어요.”

 

 

아내와 딸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옷이 없긴 없나 봅니다.

그렇더라도 옷에 대해 별반 관심 없었습니다.

 

결혼 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대충 편히 걸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단지, 옷은 추위와 더위 등을 피하면 되고, 추하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옷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겉을 치장하는 복장이란 의미의 ‘외면의 옷’입니다.

 

외면의 옷은 그 사람의 이미지와 경제력 등을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또 청빈과 겸손 혹은 허영과 사치 등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는 성형으로 대표되는 외모 지상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감싸는 ‘내면의 옷’입니다.

 

내면의 옷은 그 사람의 가치와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자신만의 색깔로 타인과 구별되는 독특함입니다.

내공 혹은 향기로 불리기도 합니다. 때로 독선과 아집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내면의 옷과 외면의 옷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아름다울 것입니다.

 

 

꽃을 든 중년의 뒷모습(꽃중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천의 민속』(서원대 호서문화연구소, 1975년)에 수록된 「옷 잘 입은 사람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는 외당에서 말하는 소리가 내당에 들리면 안 되지만, 워낙 손님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외당에서 하는 소리가 내당까지 들리곤 했다. 어느 날 부자가 들어 보니, 자기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이 옷을 가장 잘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부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궁금하여 가난한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는지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 집에 가니 집주인이 부자를 객실로 인도하는데, 가만히 보니 무명 바지저고리를 한 벌 입고 있었다. 부자는 명주옷을 입고 갔는데, 옷을 잘 입는다는 사람이 싸구려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부자는 집주인과 마주 앉아 지필묵을 놓고 서로 글을 한 줄씩 문답하며 시간을 보내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부자가 일어나 앉았는데, 밖에서 무명 바지저고리를 한 벌 들여보냈다. 집주인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벗어 놓고 새로 들여온 무명 바지저고리로 갈아입었다.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매일 갈아입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옷을 잘 입는다고 소문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루 입었던 옷을 가져다가 빨래를 하여 이튿날 다시 입는다는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은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다녀서 옷을 잘 입는다고 소문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는 그 정성이 훌륭해서 옷을 잘 입는다고 소문이 난 것이었다.”

 

 

여기에서 얻는 교훈은 외형상 초라해도 빛날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빤히 보이는 물질보다 정신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빠, 옷 매치가 영 아니다. 다시 골라 입어요.”

 

 

아빠가 입은 옷에 대한 가차 없는 딸의 품평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난 주말 아내에게 이끌려(?) 옷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 또한 내세운 명분은 명확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과대 포장할 필요는 없지만, 나이 들면 들수록 깔끔하게 보이는 게 좋다.”

 

 

백 번 천 번 동의합니다.

중년 남편을 예쁘게 꽃중년으로 가꾸고자하는 아내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서글펐습니다.

 

아무래도 아내는 남편이 노력 중인 ‘내면 옷’의 아름다움 추구에 대한 하염없는 기다림을 끝내려는 심산 같아섭니다. 삶의 깊이가 부족한 게 누구 탓일까, 마는...

 

 

아내와 함께 매장에서 본 옷들은 화려한 패션에서부터 기능과 실용성을 강조한 아웃도어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옷들에 비해 매장 안은 썰렁했습니다.

백화점뿐 아니라 일반 옷 매장까지 손님이 줄어 울상이라더니 눈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옷 고르기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왕 옷을 살 거라면,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옷 고르기를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나이 들어 초라해질 자신에 대한 반발인 셈입니다.

다만, 내면의 깊이가 깊어지길 바라면서….

 

 

중년 어떡해야 매력이 깃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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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우드랜드에서 본 나무와 바위, 삶과 이치

 

  

 

추석 잘 쇠셨죠?

 

지난 3일 전남 장흥 우드랜드에 갔습니다.

여기서 ‘나무가 바위를 어떻게 깨트리는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나무의 힘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상상이 가능합니다.

 

바위틈에 떨어진 씨앗이 자리를 잡아 힘겹게 뿌리를 내립니다.

나무가 커 가면서 뿌리가 바위 틈 속을 비집고 자라납니다.

자라나는 나무에 틈을 내어 준 바위는 급기야 갈라집니다.

 

나무와 바위를 통해 태어나서 자라고 소멸하는 자연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 한 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의미의 '적수천석(滴水穿石)'과 비슷합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이 바위를 뚫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대단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힘없는 생명일지라도 자기중심이 분명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내면의 힘을 쌓기 위한 과정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무와 바위가 연출한 이 한 장면은 사색의 길로 이끌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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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앞서 국민 위한 내공쌓기가 최우선
[마음대로 미래 사회 진단하기-3] 줄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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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가 당신의 미래를 좌우한다.”


우리의 현실을 비유한 말이다. 출세 등을 위해 ‘줄서기’를 잘해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는 줄서기를 강요한다. 싫어도 줄을 서야 하는 세상인 게다. 자칫 줄서기를 잘못했을 경우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한다.


줄서기는 좋은 말로 ‘인맥’, 혹은 ‘지인’ 쯤 되겠지. 나쁜 말로 ‘계보’랄까?


어쨌든, 줄서기는 우리네 정치, 경제, 생활 등 모든 부분을 망라한다. 긍정보다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이걸 긍정의 힘으로 바꾸면 좋지 않을까?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


줄서기의 초고봉은 ‘보스’로 불린다. 우리 정치사에 있어 대표적인 예는 김영삼과 김대중일 게다. 이 둘은 경쟁에서 화합으로 때론 갈등을 낳았다.


지금 가장 잘나가는, 영향력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누굴 떠올릴까? 대부분 그를 지목할 것이다. 차기 대권 유력 주자니까.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 1위를 지키고 있으니까.


그래 설까? 무슨 일만 생기면 소위 잘나가는 정치인들이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이를 즐기는 것처럼 그는 하명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함구로 일관한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애간장이 다 타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무겁게 입을 연다. 때를 아는 게다. 이번 동남권 신공항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 공항 문제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은 게 됐다.”


말도 길게 안한다. 할 말만 딱딱 골라 말한다. 그러면 원군을 얻은 듯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체신 머리 없는 정치인들 같으니라고.


이래가지고 무슨 놈의 정치를 한다고. 하기야 이렇게라도 줄을 서야 한 자리 차지하지. 체면이 벼슬 주는 것도 아닌데. 

 

줄서기에 앞서 국민을 위한 내공 쌓기가 최우선


내년이면 대통령선거다. 그래서 여권에서도 어차피 줄서기를 해야 한다. 이런 판에 모험을 걸었다간 찬반 신세다. 유력 주자에게 줄대기로 눈도장을 찍는 게 최고다.


지금이야 친이 친박으로 나눠져 있지만 조만 간에 정리될 게 뻔하다. 그렇지 않다면 분당 밖에 없다.


당을 쪼개기란 쉽지 않다. 까딱하다간 유력한 대통령 자리가 날아가는 아픈 현실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어쩔 수 없이 구심점은 지나갈 권력이 아닌, 미래 권력으로 뭉쳐야 할 처지다.


하지만 줄대기도 난감하다. 처음에는 아무나 받아주지 않을 확률이 크다. 튕기고 봐야 얻을 게 많다. 충성 경쟁에도 유리하다. 그런 후 세 불리기를 통해 대통령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 들게다.


그래서 세상살이는 수 읽는 눈이 필요하다. 삶 속에서 얻은 내공은 한 순간에 큰 힘을 발휘한다. 수읽기도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꾸준한 내공 쌓기가 필요하다.


그래서다. 자신의 출세와 정치를 위한 줄서기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내공 쌓기가 최우선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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