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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빈다고 주겠습니까?”
[전북 부안 선문답 여행] 단풍에 마음 홀린 ‘내소사’

 

 

 

 

 

단풍, 땅에 내려 앉았습니다.

 

 

전북 부안 능가사 내소사, 내공이 느껴지는 절집입니다.

 

 

중년의 여유가 묻어납니다.

 

 

 

 

가을, 단풍과 함께 스스로 깊어갑니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거 모두 훌훌 털고 홀로 다음 생(내년)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대지도 내년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나자 들녘이 텅 비었습니다. 이를 보니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이 넓어져 여유를 되찾은 듯합니다. 가을의 끝자락,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의미 있을 터.

 

 

경남 창원 성불사 청강스님 및 신도들과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로의 단풍 구경 겸 선문답 여행에 나섰습니다. 내소사로 가던 중, 차 안에서 갑자기 중년 여인들의 행복한 감탄 소리가 터졌습니다.

 

 

 

 

내소사 단풍 또한 감탄을 불렀습니다.

 

 

순수한 행나무 단풍입니다.

 

 

환한 웃음이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저 단풍 좀 봐. 와~, 진짜 곱네.”

 

 

눈이 잽싸게 말을 뒤쫓았습니다. 쌩쌩 달리는 차장 밖으로 한 무리의 단풍이 런웨이 위를 걷는 패션모델처럼, 어느 새 나타나 가벼운 걸음걸이로 혼을 빼더니, 이내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단풍은 중년 여인들이 충분히 감탄할 만 했습니다. 내소사에 단풍 보러 가는데, 그 단풍 보기 전 예고편에 마음 다 빼앗기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단풍의 감탄 속에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찰라,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녀 얼굴엔 천상의 어린아이 같은 환한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웃음, 어찌나 맑던지.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세상에서 처음 짓는 순백의 웃음과 표정 같았습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 온, 그래서 굴곡의 삶을 아는 중년 여인에게서 어떻게 저리 순진무구한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옆자리 여인에게 속삭였습니다.

 

 

 

 

해맑은 그들의 이름은 '어머니'였습니다.

 

 

 

 

“저 해맑은 표정과 웃음 좀 보세요.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그녀는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중년 여인이 어때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별 거 아라는 듯 툭 말을 던졌습니다.

 

 

“단풍을 보려는 중년 여인의 순수한 마음이죠. 단풍이 주는 선물 아니겠어요?”

 

 

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무릎을 탁 쳤습니다. 중년 여인들은 고된 현실에 적응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그렇게 자신의 본성을 가슴 속 깊이 그대로 간직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아름다운 단풍을 접한 순간 숨겨두었던 본심을 단숨에 꺼낸 거였습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중년 여인들이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자연은 모두를 해맑게 합니다.

 

 내소사 단풍은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입니다.

 

 

 스승과 제자도 내소사의 기품 아래 섰습니다.

 

 

 

 

 

 

내소사 단풍은 경계 없는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

 

 

모든 것이 소생한다는 ‘내소사(來蘇寺)’.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일주문(一柱門)’. 그 주변의 노랗고 빨간 단풍이 마치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듯합니다.

 

아 뿔 사! 이 경계마저 없애라 했거늘…. 얕고 옅었던 단풍은 절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진해집니다. 내소사가 곧 진정 모든 것이 소행하는 별천지(別天地)입니다.

 

 

 

 

 

스님, 민머리 위에 올린 천이 곧 불이문이었습니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공중에 전나무 향 가득합니다. 스님, 전나무 향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중입니다. 스님, 내리는 비를 피하려 했을까?

 

전나무 숲 속에 받쳐 든 우산 숲 사이로, 스님의 민머리에 가만히 올린 천이 빙그레 웃음 짓게 합니다. 스님이 곧 ‘불이문(不二門)’인 게지요. 어찌 너와 내가 다르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며, 생(生)과 사(死)가 다르겠습니까.

 

 

 

 

 

감나무에 달린 감이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 시를 불렀습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중년 여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잊었던 본심을 기어이 꺼내고야 말겠다는 듯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이끕니다. 단풍에 곱게 취한 맑디맑은 중년 여인들 얼굴에 동자승이 한명 씩 내려앉은 듯합니다.

 

그래,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란 시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입니다.

 

 

 

 

 

단풍은 사람을 순수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순수의 내소사 대웅보전입니다.

 

 

여기가 어디지? 속세!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빈다고 주겠습니까?”

 

 

아~! 내소사 단풍에 취한 채 차에 올랐습니다. 이 단풍에 취하지 않는다면 내소사 단풍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례지요. 밀양에서 온 옆자리 중년 여인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 부처님께 무엇을 빌었습니까?
“빌다니요. 부처님께 무얼 한 게 있어야 빌지요. 무작정 빌면 염치없지요.”

 

 

- 거 무슨 말입니까?
“다들 부처님께 건강 주시고, 돈 주시고, 행복 주시라고 빌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무작정 빈다고 주겠습니까? 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부처님께 받을만한 사람이 빌고 받아야지요.”

 

 

- 이렇게 절집 순례 다니는 거 보면 부처님께 받을 만 하신 거 같은데?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저는 부처님 전에 절 올린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저까지 뭘 주라고 바라다면 부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속으로 ‘별 소리 다 듣네’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삶이 중년 여인을 부처로 승화시킨 겁니다. 마치 큰스님으로부터 죽비로 호되게 맞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중년 여인, 그들의 이름은 단풍 속에 빛난 우리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절집에 가가워질수록 단풍이 깊어졌습니다.

 

 

부처님께 무얼 빌었을까?

 

 

내소사 단풍은 '힐링'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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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우도 금강사 제초작업에서 든 생각 한 자락
제초작업의 양면성과 웃음의 의미 및 우리의 보물은

 

 

 

부지런한 처사님이 아침 일찍부터 풀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우도 금강사 관세음보살과 동자승 뒤로 성산 일출봉이 보입니다.

덕해 스님께서 벤 풀을 빗자루로 쓸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풀이 무성합니다.

무심했었습니다. 바삐 지낸 탓입니다.

 

식전(食前)부터 “애~~~ 앵” 날카로운 기계음 소리가 진동합니다.

밖을 살피니, 한 처사가 풀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절집의 어지러운 마당이 많이 거슬렸나 봅니다.

 

 

새벽 예불 후, 서예 연습에 몰두하였을 덕해스님(제주도 우도 금강사)도 머리를 문 밖으로 쏙 내미시고는 빙그레 웃습니다. 이심전심의 염화미소였습니다.

 

벌써 이럴 것임을 알았던 게지요. 그 모습이 어찌나 자애롭던지, 반할 지경이었습니다.

 

 

 

“일찍 오셨습니다.”
“아침에 풀 베어 놓고 일 가려고요.”

 

 

부지런한 손놀림입니다.

읽던 책을 접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스님은 이미 나와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예상 못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생각하는 순간 몸이 움직인 게지요.

게으름을 멀리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에서 불상을 배치하는 원리를 떠올렸습니다. 

 

 

불상은 대개 부처님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자리합니다.

 

사자를 새긴 관을 쓰신 문수보살은 지혜(智慧)를 상징합니다.

또 코끼리 문양의 관을 하신 보현보살은 행(行)을 나타냅니다.

이는 “정신과 육체가 함께 움직여야 이상적인 걸 일깨우기 위함이다”고 합니다.

 

 

“절집 주위가 점점 깔끔합니다.”

 

 

그가 뜻하지 않은 칭찬에 미소 지었습니다.

제주도 우도봉과 성산 일출봉을 뒤 배경 삼아 움직이던 그가 관음보살상 및 동자승과 나란히 선 모습에서 부처를 생각했습니다.

 

부처가 어디 따로 있던가요. 행하면 그게 부처님이신 거죠.

그가 지나간 자리에 널브러진 풀의 흔적들은 스님께서 정리하셨습니다.

 

 

 

새벽 예불 후의 은은한 우도 금강사 풍경입니다.

관세음보살과 동자승 그리고 보시하는 처사... 

풀을 베는 게 아니라 조사뿐다는 표현이 재밌었습니다.

 

 

 

“저건 풀을 베는 게 아니라 사투리로 풀을 완전 ‘조사뿌네요’. 그렇지요?”

 

 

스님께선 안절부절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아쉬움에 내뱉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조사뿐다>는 단어가 왠지 처절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야생에만 존재했던 단어처럼 묘한 맛과 여운이 살아났습니다.

 

 

“저 처사님 얼굴이 마치 ‘살생부’를 손에 든 ‘한명회’ 같지 않습니까?”
“스님 어찌 저런 덕행에서 한명회를 떠올린단 말입니까! 너무 의욉니다.”

 

 

반발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는 땀과 제초작업 중 튄 풀이 뒤엉켜 얼굴이 엉망이었습니다.

스님께선 잘려나가 튄 풀의 파편과 땀을 피의 아우성으로 읽은 겁니다.

 

그 모습이 자연스레 조선 세조 때 처절했던 살생부와 한명회를 떠올리게 한 거죠.

우리네 역사에 이 뿐이겠어요?

 

 

그렇더라도 스님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건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제초작업의 양면성을 같이 봤다는 겁니다.

 

칼날에 쓰러진 풀들의 아우성과 절집을 깨끗이 치우는 처사의 기쁨.

즉, 잡초들의 죽음에 가까운 고뇌(苦惱)와 부처님이 기거하는 절집에 행한 덕행(德行)이었습니다.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둘째,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살생부와 한명회를 떠올린 내공입니다.

 

근본은 아마 <세월호 참사>지 싶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눈 뻔히 뜨고서도 살리지 못한 중생들의 죄책감.

스님은 이를 ‘이 시대의 무능’으로 표현했습니다.

어쨌거나 무능한 정부는 살생부를 움켜쥔 허황된 한명회가 된 꼴이지요.

 

 

혼자 계신 스님은 항상 '행'이었습니다.

제주도 우도 금강사, 절집 같지 않아 좋았습니다.  

대학살에도 살아남은 덕해스님의 씀바귀 밭입니다.

 

 

암튼, 알고 보니 스님께서 안절부절 하신 이유는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아~ 글쎄, 본인이 아끼는 야채 쌈 밭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까, 노심초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야채 쌈은 부드럽고 독특한 향으로 인해 토끼가 좋아하며 잘 먹는 <씀바귀>였습니다. 요즘 말로 ‘헐’이었지요.

 

 

씀바귀(Ixeris dentata)는 국화과의 다년생 풀입니다.

뿌리와 어린 순은 나물로 먹습니다. 잎의 상처에서 분비되는 흰 수액은 쓴맛이지만 기름 혹은 초간장에 무쳐 먹으면 오히려 입맛을 돋운다고 합니다.

 

저는 이를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스님께선 쌈으로 드신다니 자연식에 놀라울 뿐입니다.

 

 

“다행이 스님의 쌈 밭은 대학살에서 살아남았네요.”
“그러게요. 이게 다 부처님의 가피지요.”

 

 

한담을 나누며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을까.

그가 잠시 손을 멈추고 땀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우릴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습니다.

하얀 이가 더욱 하얗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그가 잡초들에겐 한명회였을까?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씀바귀 밭은 왜 치지 않고 두셨어요?”
“스님이 즐기는 야채 쌈 밭인 줄 뻔히 아는데 어떻게 쳐요. 스님 맛있게 드시라고 그냥 뒀어요.”

 

 

씀바귀 밭을 남긴 건 그가 스님을 위해 베푼 최대한의 <자비>였습니다.

누가 스님이고, 누가 처사인지 경계가 없었습니다.

 

세월호 실소유주로 구원파 목사였던 유병언.

그는 목사와 신도의 경계를 넘어 신계에 존재했다지요?

유씨도 죽음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쯤에서 시 한편 읊지요.

고 변재환 씨의 미발표 시 ‘쓴’ <웃음>입니다.

 

 

국화를 다듬는 덕해스님.

 

 

 

      웃 음
                고 변재환

 

  스님이 칼 갈고
  목사가 약을 판다

 

  목 좋은 자리에서
  매일 굿판 펴

 

  두 분 성인(聖人)
  긴급 회동하시니

 

  부처님 장발하고
  예수님 삭발하셨더라

 

 

웃음을 잃은 현시대에 입장 바꿔 생각하며 서로를 잘 보살피라는 발상이 도드라집니다.

또한 일어날 수 없는 두 분 성인의 긴급 회동(여와 야)에도 민생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구도자답게 활동해야 성인의 뜻처럼 현실 속에서 천당과 극락이 될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람이지 싶네요.

 

 

하여간, 스님께서 씀바귀 밭을 지켜 준 그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제가 금강사에 오기 전까지 절에 한 번도 온 적 없답니다. 우연히 옛 것을 좋아한 제가 밖에서 돼지 여물통을 차에 실어왔다가 절에 내려놓지 않고 그냥 갔다가, 뒤에 돼지 여물통을 갔다 주러왔던 인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 우도 금강사에서 얻은 최고의 보물 중 하나지요.”

 

 

그렇다면 속세에 있는 우리의 보물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들의 2세, 아이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던 아이들을 위해 정부가 철석같이 약속했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아직까지 미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스님께서 내온 저녁 공양에 고추와 함께 씀바귀 쌈이 올랐습니다.

속가에서 쌈밥을 즐겼던지라 쾌재를 불렀습니다. 쌈부터 맛보았습니다.

 

씀바귀를 손에 펼쳐 밥을 얹고, 그 위에 된장을 올린 다음 도르르 말아 입에 넣었습니다.

신선한 야채의 향은 쌉스름 하면서도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엄청 자비로운 맛이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저녁 공양에 올린 씀바귀 쌈입니다. 맛요?

부처님 왼편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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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돌고도는 역사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절 같네요
    쪽바리 제주도도 일본땅이라 할만하네요~
    그래서 땐놈들한테 시민권주면서 파는것인가요
    과거의 어느때로 다시 간 느낌?

    2014.08.03 20:31

마음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창원 성불사 신도들과가을 단풍 산행에서 배운 것

 

 

 

 

 

 

 

 

 

 

“차가 왜 이리 막히지?”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더이다.

‘단풍’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더이다.

도로가 짜증 날 정도이더이다.

 

짜증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 아니더이다.

단풍 구경. 이는 잠시 자연을 잊고 지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더이다.

 

 

“단풍 보러 갈까?”

 

 

단풍 구경은 정해진 시간 속에 잠시의 움직임.

이 시간 요긴하게 쓰는 게 최선이더이다.

 

산 중에서 익어가는 감이 여유를 주더이다.

이렇게  낙남정맥 중 경남 창원과 함안을 아우른 여항산 단풍 나들이를 갔더이다.

 

 

여항산에 퍼질러 앉으려는 단풍이 나그네에게 세 가지 마음 준비를 요구하더이다.

창원 성불사 신도들 착착 마음 준비를 하더이다.

 

산행 길 입구에서의 단체사진이 그것이더이다.

사진 찍을 때의 우왕좌왕과 긴장, 그리고 올바른 몸가짐은 단풍에 요구에 부응하는 몸짓이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는?

 

 

첫째, 자연에 귀의할 마음가짐이더이다.

마음이 열려야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더이다.

 

둘째, 자연을 보는 눈이더이다.

자기 방식대로 감상하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보는 무위자연을 요구하더이다.

 

셋째, 자신을 되돌아보라 하더이다.

지나 온 과거를 잊지 말고, 과거에서  배움을 구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영위하라 하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 방법에 따라 산을 올랐더이다.

그랬더니 나그네가 되더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름에 있어 ‘헉헉’거림은 고단한 육신이 내뱉는 뱃고동 소리로 들리더이다.

항구에 도착을 알리는 굵은 저음의 뱃고동 소리는 마음이 열렸음을 의미하더이다.

 

 

 

 

 

 

 

 

마음이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스님 : “‘불이(不二)’는 뭔고?”
나그네 : “제 아호(雅號)입니다.”

 

스님 :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무이(無二)도 있는데 왜 부리(不二)로 했을꼬?”
나그네 : “무리(無二)보다 부리(不二)가 좀 더 깊음이 있는 것 같아서요.”

 

스님 : “둘이 아니지만 하나란 의미도 아니야.”
나그네 : “그래도 하나지요.”

 

스님 : “…?”
나그네 : “…!”

 

 

 

 

 

 

 

 

산에 오르자 운해가 피었더이다.

경치가 감탄을 자아내더이다.

 

마음이 열리니 자연을 보는 눈이 정말 다르더이다.

지하세계와 인간계, 천상계 구분이 생기더이다.

세상을 이 삼계로 나누자 구름이 걸린 산봉우리가 산 중의 섬처럼 보이더이다.

 

 

바다 위의 섬이나 운해 위의 섬이나 무에 다를까마는.

섬과 산봉우리는 본디 하나였더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아귀다툼에 몰두하는 바람에 이를 잊고 있었더이다.

천상계와 인간계, 지하세계가 하나일진대 그걸 지나치고 있었더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피안은 나그네에게 삶의 지혜를 안겨 주더이다.

 

그제야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가져 온 음식들을 공터에서 펼쳤더이다.

저 마다 솜씨를 발휘한 음식을 공양했더이다.

배려와 나눔의 장터이더이다.

 

맛있는 공양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나눠 주신 진리의 법문으로 씹히더이다.

그 씹힘이 어찌나 달달하던지 놀랍더이다.

 

 

 

“보증 때문에 재산 차압당하고 쫄딱 망해 너무 힘들게 살았어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술집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어떤 사람은 이런 일 할 것 같지 않은데 왜 이 일 하냐고 묻기도 했고요.

그 고충을 어찌 말로 다할까. 아이 셋 대학 보내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살만해요. 힘들 때 스님이 중심을 많이 잡아주셨어요.”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 점차 웃음꽃이 피더이다.

웃음꽃은 홍조로 변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그 모습이 자연 단풍보다 더 예쁘더이다. 이 어이 보살이 아니리오!

 

 

 

 

 

 

 

“사진 찍는 표정이 왜 그래요. 내 남편 보듬는다 생각 말고, 마음에 그리던 정든 님 보듬는다 생각하세요.”

 

 

그제야 여인네들 입과 얼굴에서 “호호호~”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부부,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꼬.

 

그렇지만 현실은 정든 님 어디가고, 웬수만 남았을까.

이래서 산에 오르는 길은 수행 길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스님, 뭐하세요.”
“니는 보믄 모르나?”

 

 

봐도 보이지 않는 게 중생의 길. 그래서 스님을 따르는 것.

단풍 구경 온 중생들이 버린 마음 속 쓰레기를 줍고 계시더이다.

 

쯔쯔쯔쯔~, 가련한 중생의 길은 언제나 끝날꼬.

 

 

 

 

 

 

 

스님, 내려오던 길에 자작 시조 한 수 읊더이다.

웃음이 배시시 묻은 얼굴에서 승무의 춤사위처럼 나오는 목소리 하나하나가 단풍을 뚝뚝 물들이는 청음의 워낭소리로 들리더이다.

 

 

 

       단 풍


                                  청강스님

 

가을 산 단풍 빛이 몹시도 아름다워
오르는 사람마다 탄성이 잦다마는
아소서, 저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해학이 덕지덕지 묻어나더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

스님에겐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생에겐 가당찮은 깨달음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어디 죽비 없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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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목탁 소리와 함께 보리암과 하나되다
[절집 둘러보기] 기도 도량 남해 보리암

 

▲ 경남 남해 보리암은 구름 속에 있었다.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하여, 만남의 기회를 미뤘었다.

인연이 이제야 닿았을까.
드디어 지난 15일 광복절 아침,
경남 남해 보리암을 만났을 수 있었다.

사실, 남해는 내가 사는 여수와 가까운 거리다.
배로 30여분이면 닿을 수 있고, 육지로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남해의 다른 곳은 몇 번이나 갔는데 유독 보리암만은 만남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남해 금산 보리암에 안기기까지 4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마~하~반~야~….”

거의 반 백 년 만에 얽힌 묘한 인연일까.
보리암과 상견례는 가족들과 함께 했다.
세상사 인연이라지만 절집은 공덕이 쌓여야 가능한 인연.
왠지 이제야 세상에 태어난 업보를 지운 느낌이다.

 


▲ 구름이 바위들을 가리고 있었다.
▲ 보리암 가는 길은 가파랐다.

▲ 보리암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은은한 목탁 소리와 함께 보리암과 하나 되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보리암 가는 길은 서늘했다.
보리암 오르는 길은 가파랐다.
쉬 오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꾸역꾸역 올랐다. 땀이 주르르 흘렀다.
공덕을 쌓는 것이라 여겼다.

보리암 가는 길은 여유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그저 마음의 여유랄까.

그 길에서 난 나그네일 뿐이었다.
보리암은 구름 속에 있었다.
속세의 고통을 짊어진 중생을 표현하는 듯했다.

‘똑~똑~똑~똑~’

목탁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가슴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렇게 난 보리암과 하나가 되었다.  

 


▲ 중생들이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 중생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왜 그랬을까?
▲ 보리암에는 끊임없는 염원이 이어졌다.
▲ 보리암에 서니 나마저 동자승이 된 기분이었다.
  

 

자연 속에 절집을 넣은 듯 아기자기한 ‘보리암’

 

보리암은 바위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정원이 인위적이라면,
한국 정원은 자연스러움이 빛나는 정원이라고 한다.
보리암은 자연과 어울리는 한국의 정원을 산중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다른 절집이 편평한 곳에 자리해 밋밋한 맛이라면,
보리암은 자연 속에 절집을 넣은 듯한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어터지나 보다.
기도도량 보리암은 자연 뿐 아니라 사람까지 품고 있었다.


하나 아쉬움이 있었다.
툭 트인 시야를 하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당초 생각했다. 한 번의 인연으로 보리암을 알 것이란 믿음은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에 넣었나 보다.

앞으로 맺을 보리암과 인연이 기대되는 까닭이었다.

 



▲ 보리암을 이렇게 가슴에 품었다.



▲ 무슨 복을 빌까?


▲ 절집 보리암은 기붕 마저 자연과 하나였다.
▲ 보리암과 인연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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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epaktakraw.life BlogIcon 모피우스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님 기도 할 때 보리암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받은 느낌은 하늘에 앉은 보리암이었습다.
    날씨가 너무 좋았었습니다. 오랜만에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2011.08.19 20:09 신고

“공함도 공하지 않음도 없으니”
[알콩달콩 부부 이야기 10] ‘불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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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별꽃.

無相無空無佛空하니 卽是如來眞實相이라
本空至虛無一物하되 待緣垂示萬般形이로다.

“형상도 없고 공함도 없고 공하지 않음도 없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로다. 본래 공함에 이르러 한 물건도 없으되 인연을 대하여 드러내 보이니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도다.” - 수산 스님 법어 중에서 -

불갑사(佛甲寺)는 백제 불교의 도래지란 의미의 불(佛)자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으뜸인 갑(甲)자를 써 이름 지었다 합니다. 또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마라난타존자가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사찰을 창건한 바,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라 하여 붙여졌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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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무릇 인간이라 함은…

지난 10일, 아내의 벗을 만나기 위한 영광 행에서 잠시 불갑사에 들렀습니다. 주유천하에서 빠질 수 없는 산사 유람이지요. 고즈넉한 적막함과 고요가 스며 있습니다. 대웅전에 이르는 동안 야생화 사진을 찍습니다. 옆에서 보던 아내, 한 마디 전합니다.

“야생화에 관심을 갖더니 구석진 자리에 핀 꽃까지 잘도 알아보고. 많이 달라진 풍경이네요!”

그 말이 마치 ‘무릇 인간이라 함은…’으로 시작되는 스님의 법어처럼 들립니다. ‘이제야 겨우 사람 꼴을 갖춰가는구나’하는 말이겠지요. 소 울음소리를 들은 양 아내에게 부끄러운 웃음을 보냅니다.

절집의 천왕문이 어떻고, 대웅전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던져버리고 절 옆을 돌아 저수지에 오릅니다. 울창한 신록이 포근함을 전해옵니다. 새들의 합창소리에서 위안과 평화를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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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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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친구의 단란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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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의 아이들.


“불갑사에서 가장 명당자리를 잡았네요!”

“새록새록 솟아나는 저 잎들을 보세요.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나요? 저 녹색도 나무마다 색깔이 다 달라요. 자연의 색을 문명이 어찌 따르겠어요. 우리가 대하는 자연은 봄인데 (우리의 삶은) 어느 계절에 와 있을까요?”

아내의 가슴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행여 고승의 환승은 아니겠지? 아내 덕에 겨우 내 움츠렸던 새싹들의 힘찬 기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봄의 이치겠지요. 인간사, 생각하기 나름. 봄이라 여기면 봄이겠지요.

아내 친구 가족들이 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달려오고, 시차를 두고 부부가 옵니다. 악수를 할지, 합장을 할지 잠시 망설입니다. 이런 번뇌를 간파했는지 씨~익 웃으며 “불갑사에서 가장 명당자리를 잡았네요!”하며 다가옵니다.

어느 새, 아빠의 옆구리를 끼고 있는 이빨 빠진 막내 모습에서 동자승의 해맑음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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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인연을 대하여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도다

“야, 그거 누가 뜯었어?”
“그러게. 아이, 누가 천남성을 캐다가 뿌리가 너무 길어 안 빠졌는지 잎사귀만 버려놨어야.”

그렇잖아도 확인을 대비해 잎의 수분 정도로 뜯은 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는 답까지 준비한 터라 막힘이 없습니다. 아내와 벗은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매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게 “공함에 이르러 한 물건도 없으되 인연을 대하여 드러내 보이니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도다”라는 뜻은 아닐지? 텍도 없는 소리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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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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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서 본 불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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