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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바람, 모든 게 자기 마음에 있다
“그림 한 점과 글씨 한 점을 제게 주십시오!”
“꽃향기는 천리를 가고 덕의 향기는 만리간다”
청학동 화봉 최기영 님의 붓글씨 쓰는 과정과 인연

 

 

 

경남 하동군 청학동에 걸린 곶감

스님께서 흔쾌히 내어 주신 동양화

 

 

 

“그림 한 점과 글씨 한 점을 제게 주십시오.”

 

 

왜 그랬을까. 무작정 졸랐습니다. 남해사 혜신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중, 무의식 속에 필연적으로 나왔지 싶습니다. 입으론 말하고 있었으나, 귀는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너무나 즉흥적으로 터진 탓이었습니다. 스님께선 기다렸다는 듯 빛의 속도로 반응했습니다.

 

 

“그러지요. 그림과 글씨를 갖게 되면 부담이 생길 겁니다. 잘 극복하시길.”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스님께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에 걸린 세 그림 중 마음에 든 그림 하나를 골라잡길 종용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그림 중 하나는 자네 것이야. 왜 이제 가져가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무안함과 고마움을 변명으로 대신했습니다.

 

 

서예실 앞에 선 화봉 최기영님, 공예가 장형익님, 혜신스님(우로부터)

 

 

 

 

“아버지로써 사춘기 아이들에게 남기고픈 정신적 메시지를 그림과 글로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요.”

 

 

고민 끝에 해정 조성순 님의 동양화 한 점을 골랐습니다. 이와 동시에 스님께선 표구 째 즉석 포장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집까지 손수 배달해 주셨습니다. 느닷없이 엉겁결에 그림 한 점을 얻게 되었습니다. 글씨 한 점은 서예가를 직접 만나 작품과 인연이 닿는지 여부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찾은 곳이 경남 하동군 청학동의 화봉 최기영 님의 ‘수미산방’이었습니다.

 

 

붓끝에서 나오는 글씨를 보며 거미줄을 떠올렸습니다. 왜?

 

 

 

 

아버지의 바람, 모든 게 자기 마음에 있다?

 

 

청학동의 화봉 선생을 만났습니다. 선생과 만나는 동안 두 개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글을 받게 될지 말지와 상관없이. 인연에 맡기는 길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로 꽂힌 글귀는 선생의 집 안방에 걸렸던 이것입니다.

 

 

“길상여의(吉祥如意)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뜻대로 되길 바란다.”

 

 

꽂힌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들이 그저 “세상사 모든 것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일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걸 깨우치는 순간, 욕심까지 버렸으면 하는 아비의 바람이었지요. 두 번째로 꽂혔던 건 수미산방에 걸렸던 작품입니다.

 

 

 

 

 

“화향천리(花香千里)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인만리(德人萬里)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글은 꽃 향과 사람의 덕 향기를 담은 듯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구는 “난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묵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난향백리(蘭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와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난의 향보다 먹물 향이, 묵향보다 사람에게 나오는 덕의 향기가 더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화봉 선생 

먹의 농도를 이렇게 써보고 조절한다 합니다.

먹은 이렇게 붙여서 쓰신다더군요...

 

 

 

 

“그림 한 점과 글씨 한 점을 제게 주십시오!”

 

 

“쓰다 남은 먹은 이렇게 붙여서 마지막까지 쓰고 있습니다. 먹 하나라도 그냥 버리는지 않습니다.”

 

 

수미산방 안 묵향이 은은했습니다. 그가 커피를 권했습니다. 고요 속에 먹을 갈았습니다. 수줍은 웃음을 살며시 띤 채 먹을 갈던 그가 설명했습니다. 먹이라도 손에 익은 걸 버리자니 무척이나 아쉬웠던 게지요. 검소한 삶으로 읽혔습니다.

 

 

 

 

글씨를 쓰기 전 잠시간의 침묵 속에는 모든 게 들어 있었습니다.

 

 

 

 

“….”

 

 

붓을 움직이기 전 잠시 잠깐의 침묵.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긴장이 휘몰아쳤습니다. 붓이 움직였습니다. 어떤 글자를 쓸까, 하는 궁금증은 뒷전이었습니다. 글을 써 내려가는 붓을 보니 떠오른 상황 하나가 있었습니다. 왜 하필 거미 똥구멍이었을까. 그건 똥구멍에서 나오는 실로 자신의 집을 짓는 거미의 규칙적이고 열정적인 움직임 때문이지 싶습니다.

 

 

 

 

 

 

“吉(길)ㆍ祥(상)ㆍ如(여)ㆍ意(의)”

 

 

그가 글을 완성했습니다. 많은 낙관 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낙관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가 봉투에 제 이름을 쓴 후 글을 담아 주었습니다. 그와의 인연은 이렇게 닿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전하려는 삶의 의미가 빛을 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덕이 향을 발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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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왜 쓰고, 그리게 하셨을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거울?
[아버지의 자화상 1] 벼루, 먹, 우리나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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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거리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과거는 현재를, 현재는 미래를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삼십여 년 전.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여름철이면 정어리를, 겨울에는 돔을 주로 잡았던 듯합니다.

지금은 물고기 씨(?)가 말라, 어민들이 삶의 터전인 황폐화된 어장을 떠나는 실정이지만, 이때만 해도 고기가 넘쳐 났지요. 특히 기억되는 건 잡아온 정어리를 털 때, 그물 뒤에 서서 땅에 떨어지는 정어리를 줍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던 광경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게 뭐라 한 마디 하실 법도한데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제가 재미삼아 주어온 정어리로 만든 찌개는 아버지께서 가져오신 것 보다 ‘더 맛있었다’는 순전히 혼자만의 별난 기억도 있습니다. 굳이 정어리를 주어올 필요가 없었는데도 사람들 속에서 주웠던 것은 눈망울을 크게 뜨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입니다.

초등시절, 붓글씨와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게 하셨던 ‘아버지’

제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강하게 각인(刻印)되었던 무렵은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습니다. 이때 당신은 붓으로'一'자(字)와'l'자(字)를 쓰게 하시고, 우리나라 지도를 사실대로 그리게 하셨던 기억입니다.

당시, 벼루와 먹을 가져오라시며 화선지 대신 신문을 펼쳐놓고, 벼루에 물을 부어 먹 가는 법을 일러주셨죠. 그리고 ‘이렇게 해 봐라’ 했던 아버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대한 저는 당시 팔 아픈 줄도 모르고 내내 먹만 갈았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붓에 먹을 묻혀 신문 위에 ‘ㅡ’자만 쓰게 하셨지요. 그 후에는 ‘l’자만 썼었지요. 그 때, 왜 아버지는 똑 같은 글자만 쓰시게 하실까? 의아했지요. 덕분에 그렇잖아도 튀어 나온 입이 더욱 튀어나왔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붓글씨를 배운 후 아버지는 위도와 경도를 그리는 방법을 일러 주시며, 도화지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위도와 경도 그리는 데는 자와 콤파스, 지우개 등이 필요했지요. 자로 간격을 재고, 그 간격에 맞게 도화지에 그리는 작업은 많은 신경을 써야 했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지우고 다시 그려야 했었지요.

위도와 경도가 그려지면 우리나라 지도의 외곽선을 옮겨야 했구요. 우리나라 지도 그리기는 꼭 압록강에서 시작해 압록강에서 끝이 났지요. 제일 쉬웠던 부분은 두만강과 남해안이었던 거 같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곳은 영일만 부근의 호랑이 꼬리와 서해안이었지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고기 잡으러 가실 때는 의례히 '一','l'쓰기와 지도 그리기는 숙제로 남았고, 오시면 검사를 맡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칭찬과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유년(幼年)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입니다. 이 과제는 5학년까지 계속되었고, 이후로 아버지의 숙제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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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런 것이겠죠?

세상을 넓게 보고 큰 뜻을 품어라 시던 ‘아버지’

당시에 저는, 아버지가 내려주신 과업(課業)을 나름대로 즐겼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 다른 아이들이 하지 않은 나만의 숙제를 하게 되었다는 것, 먹을 갈던 때의 부드러운 감촉, 우리나라 지도를 그린다는 사실에 대한 흥분 등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 대학 졸업 후 3년여 동안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때로 다른 과목을 대신 채우곤 했는데,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면 ‘선생님 지도 참 잘 그리네요!’ 하는 소리를 듣곤 했지요. 그만큼 지도 그리는 데에는 뿌듯한 자신감이 묻어 있지요. 이것이 제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흔적입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一'자와'l'자만 왜 쓰게 하셨을까? ‘人’(사람인)과 ‘ㆍ’(점, 마침표) 와 서예가들이 즐겨 쓰는 도(道)ㆍ불(弗) 등 폼 나는 다른 글자들도 많은데…….

또한 아버지는 우리나라 지도를 왜 그리게 하셨을까? 민족의 비극이었던 6ㆍ25를 겪었던 아버지는 왜 남쪽만 그리게 하지 않고, 남과 북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도(全圖)를 그리게 하였을까? 등이 많이 궁금했지요.

지금은, 아마 ‘말을 아끼면서 한 길로, 자신을 세워가라’, ‘우주의 중심인 우리나라만 제대로 알아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넓게 보고 큰 뜻을 품어라’ 는 뜻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느낌입니다.

아버지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여쭤보질 않았습니다. 아니, 굳이 여쭤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편으론 꼭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뭐라 말씀 하실까? 궁금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저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둘을 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까?’ 걱정입니다. 지인들은 “아이들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아이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차분히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지녀라”는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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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정박한 배, 그리고 그 위를 다니는 새?

지금 제가 주제넘게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길까?’ 감히 생각하는 건, 대책 없이 결행했던 결혼과 부모로서 아무런 준비 없이 아이들을 낳고 기를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한 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고민을 아는지 아내는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삶 속에서 부모가 몸소 보여주는 것 이상의 교육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부여한 과제(課題)는 혹여 ‘당신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은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측하며, 오늘도 내일의 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적에도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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