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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차로 승화한 매화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수컷 개미 살아 봤자 밥만 축낸다, 그게 ‘운명’
[선문답 여행 5] 죽음, 부처님 진신사리와 개미 ‘남해사’

 

 

 

 

차 향 가득합니다.

 

 

 

 

‘삶’과 ‘죽음’.

 

둘이면서 하나라지요? 누구나 태어나 죽는 줄 압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진지한 성찰은 드뭅니다. 사는 데 정신 팔려 죽음 느낄 시간이 부족하기에. 때론, ‘개미’처럼 일해도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박한 절집, 여수 남해사입니다.

 

 

임시로 가정집에 불상을 놓았습니다.

 

 

상식을 깬 이런 절집, 정겹습니다.]

 

 

 

금방 쓱 지나가는 봄(春).

 

차 한 잔 떠올렸습니다. 매화차. 겨울과 봄의 향기를 흠뻑 머금은 싱그러운 차(茶)지요. 여수시 상암동 자내리 ‘남해사’로 향했습니다.

 

 

절집, 다녀보면 휘황찬란합니다. 남해사는 예외지요.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 흙집을 조금 수리해 불상을 모신 절집으로, 풋풋한 사람 냄새 가득합니다. 입구에는 사립문 대신 할미꽃이 반깁니다. 그래, 정이 더 가는 절집이지요. 훗날 예정된 불사(佛舍) 전, 머무는 중이랍니다. 여기 눌러 앉길 바랄 뿐!

 

 

“스님. 오늘 어째 차향이 더 좋습니다!”
“저번에 차 탓을 해서 차 우려내는데 더욱 신경 썼습니다. 온도까지 맞추고.”

 

 

아차, 싶었습니다. 혜신스님, 초장부터 까칠합니다. 하기야 구매하는 다른 차와 달리, 직접 매화 꽃망울을 따, 말려 정성껏 우려 낸, 매화차 맛을 타박했으니, 심기 편할 리 없지요. 스님의 뒤끝이 귀엽습니다. 장난기 발동, 농(弄)을 걸었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 2과입니다.

 

 흰색은 피부가 사리가 된 '백사리' 붉은색은 혈관이 사리가 된 '적사리'입니다.

 

 

 

“매화차로 승화한 매화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스님, 말없이 일어나 머리 뒤에 있던 죽비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앉아 죽비를 만지시며 설법처럼 한 마디 하시대요.

 

 

“죽비는 중간에 이렇게 뭣을 끼워 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므라드는 대나무 성질로 인해 ‘탁’나는 경쾌한 소리가 별로지요. 죽비도 관리가 필요합니다.”

 

 

뜨끔했습니다. 바로 항복했습니다. 지인, 알쏭달쏭한 표정입니다. 그가 화두를 꺼내들었습니다.

 

 

“스님들께서는 ‘다 내려놓으라고, 죽음은 옷만 갈아입는 건데, 뭐 그리 걱정 하냐?’십니다. 그러나 중생 입장에서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스님께선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들고 오셨습니다. 뚜껑을 열어 만지시며 하시는 말씀.

 

 

“이게 부처님 진신사리입니다. 빨간색은 혈관이 사리가 된 ‘피사리’고, 하얀색은 피부가 사리가 된 ‘백사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고진멸도’를 가르치신 후 89세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스님께서 대뜸 부처님을 들고 나오셨습니다. 죽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아직 죽어보지 못해 모르겠다는 건지…. 스님께서 부처님 사리를 모시게 된 경위를 밝혔습니다.

 

 

 

남해사 혜신스님. 차 맛이 일품입니다!

 

 

 

“도광스님께서 태국 아유타 사원에서 8년을 수행하시다, 귀국 길에 32과를 받아 오셨습니다. 그 중 제가 2과를 시주 받았습니다.”

 

 

아무에게나 툭툭 건네질 부처님 진신사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금오문중의 고승, 도광스님께 사리 2과를 받았다니, 놀라웠습니다. 이는 인연 등이 맞아야 합니다. 자리 매무새를 고쳐 앉았습니다. 당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 가짜 사리가 많다고 합니다. 진짜와 가짜 구분은 어떻게 합니까?


“사리를 화장지에 얹어 물 위에 놓고 가라앉으면 진짜. 그대로 있으면 가짜입니다. 또 망치로 두드려 깨지면 가짜. 안 깨지면 진짜입니다.”

 

 

- 지금 실험해 볼 수 있습니까?


“허허~. 어찌 부처님 사리를 망치로 두드리겠습니까. <대승밀엄경>에 ‘믿음을 내고 의심을 품지 말라. 믿음이 곧 부처님이므로 꼭 해탈을 얻게 하리라!’ 했습니다. 믿음이지요. 부처님 사리는 몸보다 두 배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게 각 나라에 분배된 겁니다.”

 

 

어리석은 중생이었습니다. “스스로 어리석은 줄 아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다!(아함경)”고 하니, 그걸로 위안 받을 밖에.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천지를 돌다 여수 남해사에 앉으신 혜신스님과 선문답에 돌입했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스님은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죽기 3일 전에 감(感)으로 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바라는 죽음은 ‘승도천화(僧道遷化)’입니다. 승도천화란? 죽음을 느낌으로 알아, 행장(수의)을 걸쳐 입고, 인적이 없는 산으로 들어가, 나무 잎 등으로 잠자리를 만들어, 거기에 누워 세상을 조용히 떠나는 겁니다. 이렇게 승도천화하신 분이 ‘서산대사’입니다.”

 

 

- 죽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잘 살아야 잘 죽는 법입니다. 안개, 바람, 비가 잠시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집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는(죽음) 거 아니겠습니까.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 잘 살아야 잘 죽는다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보다, 아름답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서 저녁에 노을이 지는 것과 같습니다. 화창한 날, 해는 아름답게 떠서 아름답게 노을 집니다. 그렇지 않은 날은 뜬 것도 지는 것도 모르게 집니다. 아름답게 살면 멋있는 노을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 오래 살면 좋겠다는 사람은 빨리 죽고, 빨리 죽었으면 하는 사람은 늦게 죽는 경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쁜 사람은 대개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저승에 빨리 데리고 가 봐야 쓸데없다는 거 아닐까. 살면서 지은 업(業)을 씻을 기회를 주는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공덕 쌓지 못하고 업을 짓고 마는 어리석음이 안타깝습니다.”

 

 

-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


“삶은 윤회(輪回)고진멸도의 연속입니다. 지금은 ‘혼돈의 시대’. 이 시기에는 ‘나’를 찾아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지혜로운 길입니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야, 타인을 지극히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연잎차를 덖고 있습니다.

 

 

수개미, 날깨 한쪽이 떨어졌습니다. 운명이란?

 

 개미 천지입니다.

 

 

 

차(茶).

 

어느 새 ‘작설’에서 ‘매화’꽃을 넘어 ‘연잎’ 위에 앉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개미가 방바닥을 헤집고 다닙니다. 그러고 보니 절집 남해사 입구 벽에도 개미 천지였습니다. 헉, 개미 등에 날개가 달렸습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날개 달린 개미입니다. 호기심을 보이자 의외라는 반응입니다.

 

 

“개미 등에 날개 달린 거 처음 봐? 날개 달린 건 다 ‘수컷’이야. 수개미는 이맘 때 여왕개미와 교미한 후 다 죽어. 교미하는 수컷은 단 한 마리. 번식을 위한 여왕개미 쟁탈전이 치열하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튼튼한 날개 짓은 필수. 나머지 수컷은 교미 한 번 못하고 죽어. 삶의 임무를 마친 수컷은 살아 있어봤자 밥만 축낸다는 거지. 그게 운명이야.”

 

 

수개미의 삶이 더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습니다. 다행입니다. 인간은 이런 운명 아니라서.

 

 

삶.

 

참 어렵습니다.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 희비가 갈립니다. 삶의 가치를 물질(돈)에 둘 때와 정신(사상)에 둘 때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타고 났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니 서로 다를 수밖에. 이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죽음.

 

더 어렵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따라 차이가 분명합니다. ‘극락’과 ‘지옥’. 욕심만 부린 사람과 덕을 베푼 사람의 차이는 확실합니다. 하지만 잘 죽는다는 건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산 사람에게도 부담입니다. 오직 ‘덕(德)’ 있는 자만이 죽음 앞에 담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차 향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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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불짜리 웃음을 지니신 어느 스님의 고뇌...

불전함 도둑에 대한 스님의 일갈에 웃었던 이유가
도선생 다녀간 후 어머니 말씀, ‘있는 집에서 털지!’
스님이 꺼내신 화제 ‘불전함’, 무슨 사연 숨었을까?
맑은 사람 눈에 그의 탁함이 고스란히 보였던 것?

 

 

 

 

 

분별이 없어야 한다, 했거늘….

 

아무리 도가 높으신 분이어도 기분 나쁜 것과 기분 좋은 것의 구분은 있나 봅니다.

 

분별을 들고 나온 이유가 있겠죠?

 

 

 

새벽 예불을 준비하는 도량석 중인 덕해스님. 만물을 깨우고 있습니다.

제주도 우도 금강사입니다.

보통 절집과 달리 엄청난 보물이 기거하고 있습니다.

 

 

 

도선생 다녀간 후 어머니 말씀, “있는 집에서나 털지….”

 

 

“뭐 가져갈 게 있다고 이렇게 홀딱 뒤졌을까?

좀 있는 집에 가서나 털지….”

 

 

수년 전,

밤손님에게 집을 털린 어머님께서 웃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 새벽 예배를 다녀왔더니, 도선생이 농과 서랍, 찬장 등 뭣이든 숨길만한 곳은 죄다 뒤집어 놓았다더군요.

 

거기에 통장과 도장은 잘 챙겼더군요. 하여, 어지러운 중에 몸만 홀라당 빠져 나가신 도선생님 전에 기도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관세음보살상과 뒤로 보이는 성산 일출봉이 멋진 풍경화입니다.

 

 

 

제주도 우도 금강사에 갔더랬습니다.

선암사, 낙산사, 봉정암 등을 거친 후, 지금은 금강사에서 홀로 절집을 지키시는 덕해 스님을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스님과 매일 차를 마셨드랬습니다.

차가 좋아서였을까? 자연이 좋아서였을까? 벗이 좋아서였을까? 정신이 하루가 다르게 맑아졌더랬습니다.

 

 

“스님, 시주는 좀 들어옵니까?”

 

 

무심코 던진 말이었습니다.

근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스님께선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스님 얼굴에 가벼운 일렁거림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비웠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전에 자리한 불전함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스님이 꺼내신 화제 ‘불전함’, 무슨 사연 숨었을까?

 

 

“한 달에 10만원도 안 들어옵니다.”

 

 

개구쟁이 동자승처럼 백만 불짜리 웃음을 가진 스님의 대답치곤 궁색했더랬습니다. 관광객이 많은 제주도 우도라 돈 좀 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닌 사정이었습니다. 하기야 절집을 찾는 관광객이 거의 없고, 신도가 많지도 않은 형편이라 이해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달에 들어오는 시주가 10만원이 안 된다니, 시주 더러 좀 해주시길….

 

 

“스님, 금강사에 오신 후 기억나는 사건 있으면 하나 이야기해 주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던 질문이 또 낭패였더랬습니다. 말이 새는 날이었습니다. 통 큰 스님이어 설까. 괘념치 않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뭐가 있을까?”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하나 있다며 꺼내신 화제가 <불전함>이었더랬습니다.

 

 

“밖에 나갔다 왔더니 뭔가 이상해.

여기저기 살펴보니 불전함이 털려 있는 거라.

한번이라 배고픈 사람이 가져갔겠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하고 보시 한샘 쳤어.”

 

 

스님, 배움과 수양이 깊어 여기에서 이야기 진도가 끝나는 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웬걸. 아뿔싸! 무방비 상태에서 느닷없이 죽비로 뒤통수를 한 대 호되게 쥐어 터진 듯한 일갈이 터져 나왔더랬습니다.

 

 

백만불짜리 웃음을 지닌 덕해스님.

 

 

 

맑은 사람 눈에 그의 탁함이 고스란히 보였던 것?

 

 

“너, 우리 절에 다시는 오지 마.

다음부터 내 눈에 띠는 날에 너는 죽는다.

그렇게 살지 마.”

 

 

깜짝 놀랐드랬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요. 아, 글쎄. 절에 오지 마라니…. 눈에 띠는 날에 죽는다니…. 그렇게 살지 마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심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건 공중에 던진 스님의 진심 어린 가르침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드랬습니다.

 

 

“놀라기는….

 

그런데 어느 날 또 불전함이 털린 거라.

간혹 절에 와서 되지도 않은 말을 하고, 일을 도와 준 척하던 한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에게 냉정하게 정색하며 던졌던 말이야.”

 

 

난 또 뭐라고.

그렇지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에 의해 암묵적 불전함 털이꾼으로 지목된 그는 자기 딴에는 스님에게 강하게(?) 반항했더랍니다.

 

 

“스님, 뭣 땜에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그런데 반발이 아주 어설펐답니다. 속 보였답니다.

스님이 그를 불전함 털이범으로 지목한 것은 순전히 육감이었답니다. 맑은 사람 눈에는 그의 탁함이 고스란히 보였던 게지요.

 

 

 

바람의 길목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진한 여유로움입니다.

 

 

 

불전함이 털리고 나니까 얼마나 들어 있는지 궁금하대!

 

 

“불전함 처음 털렸을 때 낌새가 이상했는데, 그냥 넘긴 게 화근이었어.

다행이 우리 절에 CCTV가 없어 망정이지, CCTV가 있었다면 호되게 망신살 뻗쳤을 거야.

 

훗날 그는 제주도 어느 절에서 불전함을 털다 결국 경찰서에 잡혀갔대.”

 

 

인과응보(因果應報).

불가에선 업을 지우기 위한 보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스님께선 본의 아니게 도둑을 키운 꼴이 되었습니다.

 

잡히기 전에 더 따끔한 맛을 보였더라면 그는 교화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 머물렀을 때, 스님의 기상천외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스님, 구도자란 무엇입니까?

 

 

 

스님의 깊은 속, 알 길이 없었드랬습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할 수 없이 물었지요. 그랬더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불전함 털리기 전에는 그 속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

그런데 불전함이 털리고 나니까 얼마나 들어 있었을까?

그게 궁금하대. 너무 궁금해 잠도 안 오더라니까.”

 

 

하하하하. 실없이 웃음이 터졌드랬습니다.

나 원 참! 스님은 없는 살림에 뭐 가져 갈 게 있다고, 그렇게 궁금하셨을꼬. 여기에서 원효스님을 해탈의 경지로 끌어 올린 <원효대사와 해골바가지> 설화를 떠올렸습니다.

 

 

“좀 있는 집에 가서나 털지….”

 

 

앞서 끄집어냈던,

어머니께서 없는 집 털어 간 도선생님을 보고, 가엽게 여겨 하신 말씀입니다. 팔순을 넘기신 어머님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 원효대사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의 불전함 이야기는 뒤늦게 어머니를 새롭게 알게 하신 원동력이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덕해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화입니다.

금강사 뒤로 보이는 우도봉이 송두리째 안개에 막혀 사라졌습니다.

덕분에 관세음보살상과 소나무가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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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창원 성불사 신도들과가을 단풍 산행에서 배운 것

 

 

 

 

 

 

 

 

 

 

“차가 왜 이리 막히지?”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더이다.

‘단풍’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더이다.

도로가 짜증 날 정도이더이다.

 

짜증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 아니더이다.

단풍 구경. 이는 잠시 자연을 잊고 지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더이다.

 

 

“단풍 보러 갈까?”

 

 

단풍 구경은 정해진 시간 속에 잠시의 움직임.

이 시간 요긴하게 쓰는 게 최선이더이다.

 

산 중에서 익어가는 감이 여유를 주더이다.

이렇게  낙남정맥 중 경남 창원과 함안을 아우른 여항산 단풍 나들이를 갔더이다.

 

 

여항산에 퍼질러 앉으려는 단풍이 나그네에게 세 가지 마음 준비를 요구하더이다.

창원 성불사 신도들 착착 마음 준비를 하더이다.

 

산행 길 입구에서의 단체사진이 그것이더이다.

사진 찍을 때의 우왕좌왕과 긴장, 그리고 올바른 몸가짐은 단풍에 요구에 부응하는 몸짓이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는?

 

 

첫째, 자연에 귀의할 마음가짐이더이다.

마음이 열려야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더이다.

 

둘째, 자연을 보는 눈이더이다.

자기 방식대로 감상하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보는 무위자연을 요구하더이다.

 

셋째, 자신을 되돌아보라 하더이다.

지나 온 과거를 잊지 말고, 과거에서  배움을 구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영위하라 하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 방법에 따라 산을 올랐더이다.

그랬더니 나그네가 되더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름에 있어 ‘헉헉’거림은 고단한 육신이 내뱉는 뱃고동 소리로 들리더이다.

항구에 도착을 알리는 굵은 저음의 뱃고동 소리는 마음이 열렸음을 의미하더이다.

 

 

 

 

 

 

 

 

마음이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스님 : “‘불이(不二)’는 뭔고?”
나그네 : “제 아호(雅號)입니다.”

 

스님 :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무이(無二)도 있는데 왜 부리(不二)로 했을꼬?”
나그네 : “무리(無二)보다 부리(不二)가 좀 더 깊음이 있는 것 같아서요.”

 

스님 : “둘이 아니지만 하나란 의미도 아니야.”
나그네 : “그래도 하나지요.”

 

스님 : “…?”
나그네 : “…!”

 

 

 

 

 

 

 

 

산에 오르자 운해가 피었더이다.

경치가 감탄을 자아내더이다.

 

마음이 열리니 자연을 보는 눈이 정말 다르더이다.

지하세계와 인간계, 천상계 구분이 생기더이다.

세상을 이 삼계로 나누자 구름이 걸린 산봉우리가 산 중의 섬처럼 보이더이다.

 

 

바다 위의 섬이나 운해 위의 섬이나 무에 다를까마는.

섬과 산봉우리는 본디 하나였더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아귀다툼에 몰두하는 바람에 이를 잊고 있었더이다.

천상계와 인간계, 지하세계가 하나일진대 그걸 지나치고 있었더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피안은 나그네에게 삶의 지혜를 안겨 주더이다.

 

그제야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가져 온 음식들을 공터에서 펼쳤더이다.

저 마다 솜씨를 발휘한 음식을 공양했더이다.

배려와 나눔의 장터이더이다.

 

맛있는 공양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나눠 주신 진리의 법문으로 씹히더이다.

그 씹힘이 어찌나 달달하던지 놀랍더이다.

 

 

 

“보증 때문에 재산 차압당하고 쫄딱 망해 너무 힘들게 살았어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술집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어떤 사람은 이런 일 할 것 같지 않은데 왜 이 일 하냐고 묻기도 했고요.

그 고충을 어찌 말로 다할까. 아이 셋 대학 보내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살만해요. 힘들 때 스님이 중심을 많이 잡아주셨어요.”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 점차 웃음꽃이 피더이다.

웃음꽃은 홍조로 변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그 모습이 자연 단풍보다 더 예쁘더이다. 이 어이 보살이 아니리오!

 

 

 

 

 

 

 

“사진 찍는 표정이 왜 그래요. 내 남편 보듬는다 생각 말고, 마음에 그리던 정든 님 보듬는다 생각하세요.”

 

 

그제야 여인네들 입과 얼굴에서 “호호호~”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부부,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꼬.

 

그렇지만 현실은 정든 님 어디가고, 웬수만 남았을까.

이래서 산에 오르는 길은 수행 길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스님, 뭐하세요.”
“니는 보믄 모르나?”

 

 

봐도 보이지 않는 게 중생의 길. 그래서 스님을 따르는 것.

단풍 구경 온 중생들이 버린 마음 속 쓰레기를 줍고 계시더이다.

 

쯔쯔쯔쯔~, 가련한 중생의 길은 언제나 끝날꼬.

 

 

 

 

 

 

 

스님, 내려오던 길에 자작 시조 한 수 읊더이다.

웃음이 배시시 묻은 얼굴에서 승무의 춤사위처럼 나오는 목소리 하나하나가 단풍을 뚝뚝 물들이는 청음의 워낭소리로 들리더이다.

 

 

 

       단 풍


                                  청강스님

 

가을 산 단풍 빛이 몹시도 아름다워
오르는 사람마다 탄성이 잦다마는
아소서, 저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해학이 덕지덕지 묻어나더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

스님에겐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생에겐 가당찮은 깨달음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어디 죽비 없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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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철의 알콩달콩 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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