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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빈다고 주겠습니까?”
[전북 부안 선문답 여행] 단풍에 마음 홀린 ‘내소사’

 

 

 

 

 

단풍, 땅에 내려 앉았습니다.

 

 

전북 부안 능가사 내소사, 내공이 느껴지는 절집입니다.

 

 

중년의 여유가 묻어납니다.

 

 

 

 

가을, 단풍과 함께 스스로 깊어갑니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거 모두 훌훌 털고 홀로 다음 생(내년)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대지도 내년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나자 들녘이 텅 비었습니다. 이를 보니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이 넓어져 여유를 되찾은 듯합니다. 가을의 끝자락,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의미 있을 터.

 

 

경남 창원 성불사 청강스님 및 신도들과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로의 단풍 구경 겸 선문답 여행에 나섰습니다. 내소사로 가던 중, 차 안에서 갑자기 중년 여인들의 행복한 감탄 소리가 터졌습니다.

 

 

 

 

내소사 단풍 또한 감탄을 불렀습니다.

 

 

순수한 행나무 단풍입니다.

 

 

환한 웃음이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저 단풍 좀 봐. 와~, 진짜 곱네.”

 

 

눈이 잽싸게 말을 뒤쫓았습니다. 쌩쌩 달리는 차장 밖으로 한 무리의 단풍이 런웨이 위를 걷는 패션모델처럼, 어느 새 나타나 가벼운 걸음걸이로 혼을 빼더니, 이내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단풍은 중년 여인들이 충분히 감탄할 만 했습니다. 내소사에 단풍 보러 가는데, 그 단풍 보기 전 예고편에 마음 다 빼앗기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단풍의 감탄 속에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찰라,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녀 얼굴엔 천상의 어린아이 같은 환한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웃음, 어찌나 맑던지.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세상에서 처음 짓는 순백의 웃음과 표정 같았습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 온, 그래서 굴곡의 삶을 아는 중년 여인에게서 어떻게 저리 순진무구한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옆자리 여인에게 속삭였습니다.

 

 

 

 

해맑은 그들의 이름은 '어머니'였습니다.

 

 

 

 

“저 해맑은 표정과 웃음 좀 보세요.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그녀는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중년 여인이 어때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별 거 아라는 듯 툭 말을 던졌습니다.

 

 

“단풍을 보려는 중년 여인의 순수한 마음이죠. 단풍이 주는 선물 아니겠어요?”

 

 

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무릎을 탁 쳤습니다. 중년 여인들은 고된 현실에 적응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그렇게 자신의 본성을 가슴 속 깊이 그대로 간직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아름다운 단풍을 접한 순간 숨겨두었던 본심을 단숨에 꺼낸 거였습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중년 여인들이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자연은 모두를 해맑게 합니다.

 

 내소사 단풍은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입니다.

 

 

 스승과 제자도 내소사의 기품 아래 섰습니다.

 

 

 

 

 

 

내소사 단풍은 경계 없는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

 

 

모든 것이 소생한다는 ‘내소사(來蘇寺)’.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일주문(一柱門)’. 그 주변의 노랗고 빨간 단풍이 마치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듯합니다.

 

아 뿔 사! 이 경계마저 없애라 했거늘…. 얕고 옅었던 단풍은 절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진해집니다. 내소사가 곧 진정 모든 것이 소행하는 별천지(別天地)입니다.

 

 

 

 

 

스님, 민머리 위에 올린 천이 곧 불이문이었습니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공중에 전나무 향 가득합니다. 스님, 전나무 향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중입니다. 스님, 내리는 비를 피하려 했을까?

 

전나무 숲 속에 받쳐 든 우산 숲 사이로, 스님의 민머리에 가만히 올린 천이 빙그레 웃음 짓게 합니다. 스님이 곧 ‘불이문(不二門)’인 게지요. 어찌 너와 내가 다르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며, 생(生)과 사(死)가 다르겠습니까.

 

 

 

 

 

감나무에 달린 감이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 시를 불렀습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중년 여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잊었던 본심을 기어이 꺼내고야 말겠다는 듯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이끕니다. 단풍에 곱게 취한 맑디맑은 중년 여인들 얼굴에 동자승이 한명 씩 내려앉은 듯합니다.

 

그래,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란 시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입니다.

 

 

 

 

 

단풍은 사람을 순수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순수의 내소사 대웅보전입니다.

 

 

여기가 어디지? 속세!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빈다고 주겠습니까?”

 

 

아~! 내소사 단풍에 취한 채 차에 올랐습니다. 이 단풍에 취하지 않는다면 내소사 단풍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례지요. 밀양에서 온 옆자리 중년 여인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 부처님께 무엇을 빌었습니까?
“빌다니요. 부처님께 무얼 한 게 있어야 빌지요. 무작정 빌면 염치없지요.”

 

 

- 거 무슨 말입니까?
“다들 부처님께 건강 주시고, 돈 주시고, 행복 주시라고 빌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무작정 빈다고 주겠습니까? 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부처님께 받을만한 사람이 빌고 받아야지요.”

 

 

- 이렇게 절집 순례 다니는 거 보면 부처님께 받을 만 하신 거 같은데?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저는 부처님 전에 절 올린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저까지 뭘 주라고 바라다면 부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속으로 ‘별 소리 다 듣네’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삶이 중년 여인을 부처로 승화시킨 겁니다. 마치 큰스님으로부터 죽비로 호되게 맞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중년 여인, 그들의 이름은 단풍 속에 빛난 우리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절집에 가가워질수록 단풍이 깊어졌습니다.

 

 

부처님께 무얼 빌었을까?

 

 

내소사 단풍은 '힐링'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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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업 쌓기를 주저하는 건 왜일까, ‘욕심이…’
얼마나 더 살아야 ‘나’를 사랑하게 될까….

경남 창원 여항산 성불사 선문답 여행에서 배운 것

 

 

 

 

 

 

 


 

만남과 대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순간 인생을 바뀐다고 합니다. 대화를 통해 받은 감명이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겠지요. 운명적인 만남이지요. 우리들이 성인 등 선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건 그들이 생을 통해 보여주었던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바람일 것입니다.

 


‘무소유’.


법정스님이 강조하신 삶의 한 방법입니다. 무소유, 제에겐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첫째, 이처럼 아름다운 삶이 또 있을까. 둘째, 이 같이 살기엔 세상이 너무 힘들다. 왜냐면 무엇이든 가지고 마는 자본주의의 폐해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선업 쌓기를 주저하는 건 왜일까, ‘욕심…’

 

 

요즘 의도하지 않았던 절집으로의 선문답 여행 중입니다. 벚꽃, 진달래꽃 등이 만개해 향기 가득한 봄날은 사람들을 꾀어냈습니다. 봄의 손짓에 화답하듯 지난 주말, 경남 창원 여항산 성불사로 향했습니다. 청강스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스님께 한 말씀 청했습니다. 스님께선 ‘인연’과 ‘업’을 화두로 내놓으셨습니다.

 

 

思量作一因  因生更諸果(사양작일인  인생갱제과)
果還造多業  業種分苦樂(과환조다업  업종분고락)

 

생각은 하나의 인연을 만들고
인연은 다시 모든 열매를 낳으며
열매는 되돌아 많은 업을 만드니
업의 씨앗은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나뉜다!

 

 

불교에서 인연(因緣)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 원인인 인(因)과 간접 원인인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풀이 합니다. “‘나’라는 실제가 없는 무아(無我), 무상(無常)”이라는 겁니다. 무심코 맺은 인연이 열매를 맺고, 인연의 결실이 업으로 돌아온다니 쉬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업(業)은 “사람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선과 악의 소행 또는 전생(前生)의 행동에 의해 현생(現生)에서 받는 선악의 응보(應報)”라고 합니다. 즉, 삶이 즐겁고 행복하려면 악업보다 선업을 지으라는 겁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선업 쌓기를 주저하는 건 왜일까. 욕심…. 청강스님과 일문일답에 돌입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유란, ‘남에게 쓰기 위해 갖는 것’

 

 

- 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행복도 불행도 모두 스스로 짓는 겁니다. 남 탓이 아닌 내 탓이지요. 나보다 남을 위해 복을 짓고, 겸손한 마음으로 덕을 쌓아야 합니다. 죄악은 탐욕과 성냄 및 어리석음에서 생깁니다. 늘 참고,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방하착이 중요하지요.”

 

 

- 방하착(放下着)은 무엇입니까?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가지라는 겁니다. 마음속에 갖는 온갖 집착, 원망, 스트레스, 갈등 등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서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 많이 가진 사람들이 다 가지려고 하는 건 어찌 봐야 합니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무엇인가를 가졌다면, 앞으로 는 아름다운 소유가 되어야 하지요.”

 

 

 

 

- 아름다운 소유란 무엇입니까?


“요즘 빈부의 차가 큽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가졌던 것을, 이제는 모두가 함께 행복하기 위해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소유란 내가 쓰기 위함이 아니라 남에게 쓰기 위해 갖는 거지요.”

 

 

- 아름다운 소유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내가 행복하려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합니다. 혼자만의 노력으로 돈을 번 게 아닙니다. 중생에게 받았으니 중생에게 다시 돌려주자는 겁니다. 고마움을 알면 다툼이 없지요.”

 

 

- 무엇을 고마워해야 합니까?


“얼굴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못난 사람이 있어서 잘난 사람이 돋보이고 빛나는 것이니까. 이처럼 서로 경계가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돌봐야 합니다. 잘난 사람과 부자 등은 자신이 받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돌려주는 ‘회향’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나’를 사랑하게 될까….

 

 

충격이었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는데, 저도 말과 생각뿐이었나 봅니다. 소유(所有). 그저 욕심(慾心)의 또 다른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소유 앞에 ‘아름다운’이 붙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스님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利己的)’ 소유에서, 남을 위한 ‘이타적(利他的)’ 소유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의 ‘소유’가 악업(惡業)이었다면, 앞으로 자본의 소유는 ‘아름다운 소유’, 선업(善業)이어야 합니다. 놀란 가슴 추스르는 사이, 스님께서 시조 한 수 또 읊으셨습니다.

 

 

憎愛與親疎  皆是自作客(증애여친소  개시자작객)
富貴又貧賤  此亦幻中塵(부귀우빈천  차역환중진)

 

미움과 사랑, 원한과 친분도
모두 스스로가 지어낸 길손이며
부하고 가난하고 귀하고 천함도
이 또한 변하는 것 중의 티끌이네

 

 

공(空)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그저 공이겠습니까! “부처가 따로 없”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 곧 부처”란 게죠.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하는 법. 이로 보면 우리는 살면서 아직 자신을 사랑하지 않나 봅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나’를 사랑하게 될까….

 

여행은 ‘무소유’와 ‘아름다운 소유’를 선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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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세상을 엎고자 매국노 응징에 나선 '비상도'

잘못된 부의 창출, 신매국노 응징에 나선 기인 '비상도'

 

 

 

 

 

 

 

언제부터인가,

독서의 계절이라던 '가을'이

더 책을 읽지 않는 계절이 되었다더군요.

 

 

책을 멀리하는 요즘 세파에도 불구

책은 꾸준히 발간되어 독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을에 읽을만한 책,

가을에 볼만한 책 한 권 소개합니다.

 

 

<비상도(책보세)>란 의협소설입니다.

책 소개할게요.

 

 

 

이 소설은 작가 변재환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유작이다. 독립투사의 자손인 그는 생전에 물구나무 선 현실에 분개하여 그 비분강개를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가 보고 겪은 현실은 참담했다. 독립투사나 그 후손들의 해방 후 삶은 비루하고 구차하고 참담한 반면, 친일의 대가로 성가한 매국노들은 오히려 애국자로 둔갑하여 대를 이어 부와 권력을 누렸다.

 

 

게다가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을 ‘빨갱이’로 무함하여 역사와 사회에서 배척시키고, 그로써 자신들의 죄악을 덮고자 했다. 그리하여 반성 없는 역사가 한국현대사를 망쳤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자 줄줄이 어그러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작품에 대책 없는 울분을 마냥 쏟아놓는 대신 ‘비상도’의 후예인 주인공을 내세워 잘못된 현실을 통쾌하게 바로잡아 나간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비상도(조동해)에게 전통무예 ‘비상도’를 전수하는 큰스님, 비상도의 사형 백남재, 비상도의 제자 용화, 무예를 배우고자 자청하여 제자가 된 송철과 백원익, 비상도를 후원하고 사랑하는 성 여사, 천 경장과 정 기자 등이 주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들은 하나같이 혈연이나 지연, 학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해관계도 없다. 생판 남인데도 따듯한  가상한 마음과 뜻 하나로 인연을 지어 가족이 되고 동지가 되고 사제가 되고 친구가 된 이들이다.   
 

이 작품에 스님과 절집이 주로 나오는 것은, 작가가 스님(성불사 주지 청강)의 속가 아우인 연유로 그 살아온 배경이 그러해서다. 또 한반도에서는 맥이 끊긴 ‘비상도’라는 고려왕실 무예를 600여 년 만에 마침내 전수시킨 이가 스님인 연유이기도 하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현실인식은 과거청산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사람들이 영화 <명량>을 통해 ‘해묵은 영웅’ 이순신에 새삼 열광하게 된 것도 ‘난세’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에 걸친 우리의 현실이 총체적으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난세로 보고, 그 난세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영웅’을 지어냈다.

 

 

그 영웅의 활약과 좌절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진단해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주인공의 통쾌 무비한 활약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은 덤이다.

 

 

뭐든 ‘끝’이나 ‘마지막’은 애잔하고 숙연하다. 작년 연초, 손때 묻은 유고를 남기고 떠난 작가는 책이 나오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육신을 대지에 뿌리고 대신 그의 영혼을 담아낸 이 작품으로 그의 존재를 세상에 남겼다.

 

 

그는 현란하고 세련된 문장이나 수사를 구사하는 프로페셔널이 아니라서 그의 작품은 소박하고 종종 어눌하기까지 하지만 그 의기(意氣)만큼은 여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            


 

 

     

 

 

 


≻저자 소개


변재환(1957~2013)

 

1957년 11월 22일(음력) 경남 창원시 진전면에서 태어났다. 재야 문인으로 살다가 의협소설 《비상도》를 유고로 남기고 2013년 1월 19일 별세했다.


할아버지 변상태는 3.1운동 당시 경남지역 책임자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아버지 변지섭은 《경남독립운동소사》(1966), 《축성장군 최윤덕》(1994)을 저술했는데, 《경남독립운동소사》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텍스트다.


≻판형_신국판(152×224) ≻면수_446면 ≻정가_14,000원 ≻발행일_2014년 9월 15일 ≻ISBN_978-89-93854-83-1(03810) ≻분야_문학(소설)

 

마음을 살찌우는 '독서'

정신 건강의 으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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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세상을 뒤엎는 길 비상도(非常道)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왜 그런지는 아실 겁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상식한 세상을 뒤집고 상식의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올바르게 잡아가야겠습니다.

그 시작은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일부터일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한민국을 고치는 길...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새롭게 힘을 모으는 일에 기꺼이 함께 해 주시길...

 

 

인연이란......

 

올 초부터 블로그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비상도>(책보세)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블로거들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비상도> 책에 지난 해 세상을 떠난 작가 고 변재환님의 작가 서문을 대신해

제가 올린 '작가를 대신해서'입니다.

 

 

 

 

 

 

 

 

- 작가를 대신해서 -

쇼셜 디자이너 대표 임현철

 

 

“이거 함 읽어 봐!”

 

 

저자 고(故) 변재환 씨와 첫 만남은 3년 전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경남 창원에 있는 성불사 주지 청강 스님이 툭 던진 세 편의 단편소설이 그 시작이었다. 저자는 청강 스님의 속가 아우였다. 그는 시를 쓰다 소설까지 넘보는 재야 작가였다.

 

 

“읽어보고 평 한 마디 해줘. 내가 뭘 알아야지….”

 

 

저자가 형에게 소설을 주면서 평을 기대했을까. 스님이 평을 요구했다. 무명작가의 처녀 소설치곤 꽤 괜찮았다. 재치 있는 묘사가 눈을 사로잡았다. 스님이 던져주는 먹이는 점점 늘어났다. 이쯤에서 사양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무렵, 스님이 더 당차게 나왔다.

 

 

“이거 장편인데 시간 날 때 재미 삼아 읽어 보라고.”

 

 

막상 원고를 받아 왔으나, 집 책꽂이 한쪽 구석에 박혔다. 인연이었을까. 어느 날 장거리 여행 때 《비상도》원고 1권을 챙겼다. 그 원고는 고속버스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엔 꽤나 괜찮았던 동행자였다.

 

 

처음에는 별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빠져들고 말았다. 원고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교육 속에 뿌리박힌 친일과 부정부패에 맞서는 활약을 그린 영웅소설이었다.

 

 

실제로 저자의 부친 또한 창원에서 유명한 독립 운동가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에게 쌓인 울분도 많았으리라.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책을 읽는 도중 감탄이 쏟아졌다.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뻥 뚫림으로 다가왔다.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일었다. 아울러 결말에 대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이거 대박이지 싶었다.

 

 

결국 스님에게 《비상도》2권 원고를 보여주십사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저자와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 수정해야 할 대목과 느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문장과 문단 배열, 배경 등을 조언했다. 그는 무척이나 반갑게 조언을 수용했고, 고마워했다.

 

 

지난해 1월, 창원 성불사 행사에서 저자와 세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문구와 문장 수정 방법, 문예지 응모, 출판 등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나 역시 《비상도》의 구상, 인물과 배경, 작품 집필 기간, 추후 계획 등에 대해 독자 입장에서 물었다. 헤어지기 전, 그는 정중히 요청했다.

 

 

“식사 대접 한 번 꼭 하고 싶습니다.”

 

 

사촌 매제 최명락 교수(전남대)의 “공양한 후라 배부르다. 안 해도 된다.”는 거절에도 불구, 나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왜냐하면 미리 예견했던 탓일까. ‘꼭’에 찍힌 방점이 아니더라도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드시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키세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준 건 한우 등심 3인분이었다. 그는 소고기 국밥을 시켰다. 그는 국밥은 뒤로하고 우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갑작스레 병원 입원 소식이 들렸다. 이어 사흘 만에 부고를 접했다. 아마, 작가는 자신의 사후에도 이어질 나와의 각별한 인연을 이미 알고 있었던 성 싶다. 저자의 한 끼 식사 대접은 나를 그에게로 이끈 강렬한 매개체로 작용했으니.

 

 

그의 죽음은 《비상도》를 영영 묻히게 하느냐, 빛을 보게 하느냐, 기로였다. 주위와 상의한 결과 《비상도》가 출판, 영화, 드라마 등으로 빛을 보도록 나서기로 했다. 먼저 SNS 등을 통해 작품을 연재하며 출판사 찾기에 나섰다.

 

 

결국 출판은 (주)책으로 보는 세상의 김이수 주간을 만나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고 변재환 작가 영전에 책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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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려놓으면 걸림이 없고, 자유로우며, 분별이 없다!

백중,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어머니를 구하는데서 유래
8월10일, 창원 성불사 백중 49재기도 회향법회 참관기

 

 

 

경남 창원 여항산 성불사 백중 49재 화향법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조상님의 극락왕생을 비는 신도들이 모였습니다.

 

 

모든 삶에는 노력과 정성이 스며있습니다. 인연에 따른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더군요.

 

살아갈수록 불가에서 말하는 “삶=고행(苦行)”임을 느끼는 중입니다. 이 고행은 자신이 지은 업(業)으로 인한 것이기에 스스로가 이겨내는 길이 최선임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 만만찮습니다. 만만하고 편한 세상살이가 되려면 결국 <나>를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가 짓는 것이니, 결코 남을 탓할 일이 아니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덕을 쌓고, 남을 위하는 일로 복을 지을 수밖에.

 

 

삶, 쉽지 않습니다. 모든 죄악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것. 늘 참고, 적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허나, 끝없는 욕심 속에서 좌절하고 분노하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자신을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영혼과 육신의 자유를 구하기 위해 경남 창원 성불사에 갔습니다. 지난 8월10일(음력 7월15일) 백중을 맞아 백중 49재기도 회향법회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불사 백중기도는 지난 6월29일 1제를 시작으로 8월10일 회양까지 7회 동안 열렸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일은 모든 일의 출발점입니다.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백중,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어머니를 구하는데서 유래

 

 

“금강경 암송해 줄까?”

 

 

성불사로 가던 중 최명락 교수(전남대 생명공학과)가 차 안에서 의향을 물었습니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 “고맙습니다!”고 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가 <금강경>에 독송에 몰입했습니다. 금강경이 무한 위로를 주었을까? 금강경을 온전히 담아 암송하는 그의 마음이 평안을 주었을까? 여유로운 기분이었습니다. 다음은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時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이보현 보살의 극락왕생 춤 공양입니다.

잔을 올리고...

 

 

 

 

오전 9시40분. 성불사에 도착하니 회향 법회는 이미 시작되었더군요. 10여분 늦은 겁니다. 이 늦음은 차 안에서 금강경 독송을 들어야 했던 이유 같기도 합니다.

 

회향 법회는 천수경 독경, 일반 예불, 영가축원카드 낭독, 이보현 불교무용학원장의 영가 극락왕생 춤 공양, 주지 청강 스님 법문, 영가전 공양, 관계 영가님들의 옷 수령과 소각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우란분경 등에 따르면, 백중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목련존자가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중제는 살아생전 자기가 지은 업으로 인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들이 부처님의 법력에 의해 해방되는 날입니다. 하여, 백중에는 절에서 부모 등 조상님 이름으로 음식이나 옷을 지어 올렸다더군요.

 

 

신도들은 저마다 신심으로, 윤회하며 각자 인연을 맺었던 조상과 부모 형제 및 수자영가 등 자신과 직접 인연이 있고 없음을 떠나 구천을 떠도는 모든 영가들이 극락으로 왕생하는 제를 올렸습니다. 두 손 모아 비는 그들의 모습이 열반을 향한 구도자의 아름다움처럼 보였습니다.

 

 

부처님 전에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을 진행 중입니다. 

영가들의 옷을 태우기 위한 의식입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걸림이 없고, 자유로우며, 분별이 없다!

 

 

성불사 주지 청강 스님은 이날 법문에서 화두로 “불가(佛家)에서 우주 공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우주만물 삶의 본질을 규정한 세 가지 기본 명제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三法印)”을 꺼내들었습니다.

 

 

“부처님은 ‘제행무상’이라 하여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 역시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제법무아’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 삶은 고통, 즉 ‘일체개고’라고 설파했습니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고통마저도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청강 스님이 법문에서 특히 강조한 <제법무아>는 이러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은 전부가 실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때문에 나를 내려놓는 삶은 걸림이 없고, 자유로우며,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집과 분노, 소유욕, 어리석음 등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 이걸 모르나요. 실천궁행(實踐躬行)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네 삶을 고(苦)라고 했나 봅니다. ‘나’와 ‘너’의 구별이 불평등과 폭력, 행복과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 사이에서 오는 상호 비교가 가져 온 ‘분별’로 인한 고(苦)인 셈입니다.

 

 

 

 청강 스님 법문.

제행무상,제법무아, 일체개고가 뭐냐하면... 

부처님께 비옵니다!!! 

인연이 있든 없던 간에 극락왕생을 빌고... 

 

 

 

세월호 사건과 군 폭력 사망사건은 인간 욕심의 결과

 

 

“원래 인간에게 불행과 병, 고통 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별이 생기면서 각자의 업에 따라 불행과 병, 고통 등이 뒤따랐습니다.

 

업은 마음에서 오는 것.

착한 마음이 일면 선업이 되고, 욕심이 생기면 악업이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살인, 욕,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고, 화도 냅니다.

그 결과가 세월호 사건과 군 폭력 및 사망 사건 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법회에 참석한 성불사 신도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오는 것임을 아는지, 빙그레 웃습니다. 스님께서 세월호 사건과 군 폭력 사망사건을 들먹일 때에는 “그래, 맞아!”라며 인간의 욕심을 타박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악업이 없어지길 바란다면 진심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진심어린 참회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악업이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납니다.

그 업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행복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먼저 비는 것이 우선입니다. 항상 ‘나는 행복합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언제부턴가, 웃는 얼굴과 진실 된 말로 남을 대하기보다 거짓 표정과 삿된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게 일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지은 선악의 결과는 반드시 스스로가 받게 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또 업(業)을 짓고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는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삶은 부단한 정진과 수양이 필요하나 봅니다. 저와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행복과 건강을 빕니다.

 

백중 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참 가벼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영가들을 위해 지은 옷은 의식 후 불에 태워집니다.

제를 올리고... 

조상님의 은덕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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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절집에 갑니다.


가는 이유는 여럿 있지요.

산행에 갔다가...

차 한 잔 마시려고...

스님이 보고 싶어서...

부처님을 만나려고... 등등



경남 창원 성불사에 갔다가 재미있는 선문답이 있어 소개합니다.







스님 : "종무원장님은 왜 큰스님이라 안하는 겨?"

사회 : "스님이 한 분 밖에 안 계셔서..."



우문현답이었습니다만, 

이 속에는 가르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한 분인데 어찌 크고 작고가 있겠냐는 거였습니다.

원래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오당안지'의 본질을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 답변을 끌어내기까지 몇 개의 관문이 숨어 있었습니다.


첫째, 스님은 '큰스님'이란 친근한 호칭을 통해 신도들의 눈과 귀를 모았습니다.

정신을 집중하는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혜안의 누림을  노렸던 게지요.



둘째, '큰스님'이란 단어 속에서 큼과 작음의 경계를 없앴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과 부르지 않는 것의 구분없음을 깨닫기를 바라신 게지요.



셋째, 우리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스님을 어떻게 부르던 간에, 자신이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는 존재의 의미를 각인시켰습니다.


어쨌든, 


일체 중생의 고를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몸을 나투신 부처님을 향탕수로 관욕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향탕수로 관욕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정진>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모습이 바로 구도자일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죽어 사후 세계로 들어가면 염라대왕을 거쳐 아미타불을 접견하고

이어 관세음보살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피조물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고 하는데

이는 깨달음의 차이가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절집 입구에 큰 사천왕상이 서 있는 건 

사후세계 극락을 보여주는 암시라고 하더군요...



성불하소서!!!





그대 성불 하리로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청강 큰스님의 기도발이

부처님 전에 정성으로 닿아 

성불사 신도님들이 행복을 누리도록... 



부처시여!

모두 마음을 경건히 하여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성불사 신도님들

새롭게 돋아나는 신록의 싱그러움처럼

부처님을 향한 사랑이 쑥쑥 자라게 하소서!!!



올 한해 탈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고...

돈발 끝내주게 받도록 해 주시옵소서!!!!!!! 부처시여~



신도들이 부처님 전에 구름같이 모였나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 법, 승 중의 승이란?



간절한 소망이 부처님 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오당안지...



마음마음 모아

세월호 사고로 가신 

영령의 명복을 빌고 빌었나이다!



엄숙한 마음으로 관욕하시는 신도님!



부디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 가정 행복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특할 수가..............



주지스님의 설법을 경청하는 신도님들.

스님이 영험하긴 헌데, 내게도 그 영험이...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염원을 들으시고

그 소원 이루게 하시더라!!!



내 그대들의 바람을  

곧 들어주겠노라!



세존이시여!

어떡하면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겠나이까?



설법하시는 스님이 

신도들을 웃게 하시고...



"내 너희들의 바람을 들어주겠노라.

앞으로 정성을 조금 더 들인다면...."


"부처님~^^ 그러신 법이 어디 있는 겨?"


"떽끼~ 이~~~놈! 자신이 쌓은 업이 하루 아침에 없어진다더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부처님 전, 정성 끝에 보이는 

청강 큰 스님의 염화미소~~~^^



스님의 염화미소에

화답하는 신도들.

어디 부처가 따로 있답디까!



인간계에서 깨달음이 

극락에서 몇 단계 높은 곳에 오르게 하리라!



"스님, 저희들도 극락에 가신다고요? 감사해요!"

"떽끼~, 그냥이 아니고 정성을 더 들여야. 지극정성이라는 말 들어 봤지? 바로 그거야."



붓도 크기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듯

무릇 중생도 그릇이 있나니....


부처님 전 기도는 그 크기를 키움이더라!



몸은 비록 이 자리에서 헤어지지만

마음은 언제라도 떠나지 마세.


거룩하신 부처님을 항상 모시고

오늘 배운 높은 법문 깊이 새겨서


다음날 반가웁게 한 맘 한 뜻으로

부처님의 성전에 다시 만나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그대, 성불 하세요!"



신도들이 밝힌 연등,

부처님이 보살피사...

성불과 극락으로 이끄시네...



부처님의 가피가 천지간에 가득하고...





푸른 솔에 눈서리가 내리면

그 모습 더욱 두드러지고

하늘과 바다가 한 색이 되어

삼천세계를 뒤덮었노라.




사바세계의 중생은 공명을 탐하고 이익을 얻어내는데

일생의 정력을 아끼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그러나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영혼이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떨어져

윤회하는 것은 인연으로 지은 업 때문이다.



결국 업보에 의해 생활하고 또 고통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하루 빨리 본래 자기를 깨닫는 길이다.



자기를 깨닫는 방법은...?




- 어떻게 염불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르게 득도할 수 있습니까?


= "선 정을 모두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염불참선하면 정도선이 됩니다.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과 소리로 하는 염불이 하나가 되면 불성이 저절로 나타납니다.



깨어있는 자는 보살이요,

혼미에 빠져 있는 사람은 중생이라.

불법에는 인연이란 것이 있으니

인연을 만난 사람은 제도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떨쳐내자...



공양이 주는 기쁨은...




워~매~~~ 맛난 거...



열심히 정진하면...복이 찾아들지니...



정성을 들이니 웃음이 일고...



낮은대로 임하니...

모든 신도님들, 성불 할 것이요~~~



노고를 치하합니다~~~



법당에서 절하던 이 공주님이 얼마나 예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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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제, 풍어와 뱃길 수호 및 안전 기원 문화
“혼자서 다 바란다면 욕심이라 욕심을 줄였다”
[르뽀] 창원 여항산 성불사의 용왕제 참관기

 

 

 

 

 

 

 

 

 

살다보면 궁금증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삶이 수학 계산처럼 답이 딱 떨어지기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따라 유동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죽을 삶이라면 사람답게 살다 가는 게 행복이겠지요.

 

 

“일은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데 왜 나만 신통치 않고 고생만 하는 걸까?”

 

 

창원 성불사 청강 스님의 질문입니다.

 

이건 복 받기를 열심히 빌어도 남들은 다들 잘 되는 것 같은데, 유독 혼자만 잘 되지 않은 이유와 같습니다.

 

모든 게 “두꺼운 업장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묵묵히 전생의 업을 참회하며 사는 게 삶의 ‘멋’이지요.

언젠가는 자신의 꿈이 이뤄질 거란 믿음과 희망으로.

 

 

 

 

 

지난 9일, 창원 여항산 성불사 신도들과 용왕제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용왕제에 직접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잘 되었지요.

 

헌데, 목적지가 당초 경북 영덕 강구였던 게 동해안을 강타한 눈 등으로 인해 경남 남해 상주해수욕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처님 왈,

 

 

“앉은 자리가 법당”

 

 

이라 하니, 어디든 문제될 게 없지요.

 

 

차 안에서 청강 스님 한 말씀하시대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남을 위해 축원하길 바랍니다.”

 

 

이유인 즉,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보다 주변 사람 등 대승적으로 복을 빌어야 서로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국가와 세상의 발전과 평화를 비는 구국 기도회 등을 하는 원인도 대승적 차원이지요.

 

 

 

 

 

 

오전 10시30분, 상주 해수욕장에 도착했습니다.

상주해수욕장이 용왕제의 명소나 봅니다.

 

넓은 백사장에는 이미 두 군데서 용왕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겨울의 을씨년스런 해수욕장 분위기에 활력이 넘쳐납니다.

 

역시 사람이 희망입니다.

 

 

제 음식이 차려지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도는 지극 정성이 가장 중요하지요.

 

 

11시, 용왕제는 스님의 법어로 시작되었습니다.

 

 

“용왕제는 용왕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엄신중 님 전에 기도 하다보면 팔부사왕중에게 절을 드리는데 용왕은 팔부호법신장의 무리입니다.

 

팔부는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르라, 긴나라, 마후라를 말합니다. 호법이란 이 부류 중생들이 부처님께 귀의해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불법을 옹호한다는 뜻입니다. 신장이란 그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용왕은 비와 물을 맡고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신장입니다. 용왕은 한 분이 아니라 그 수가 한량없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용왕으로 여덟 분을 꼽습니다.

 

8대 용왕은 난타, 발난타, 사가라, 화수길, 덕차가, 아녹달, 마나사, 우발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왕님 전에 소원을 가지고 기도드리는 건 용왕이 비를 주관하고 관장하며 뱃길을 수호하기 때문입니다.“

 

 

 

 

 

 

용왕은 한 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까닭에 용왕에 대해 특별한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선지, 지금도 바닷가 마을에서 용왕제를 지내며 풍어와 뱃길을 수호하고 어부의 안전을 비는 민간신앙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사라졌습니다.

미신으로 치부하는 인식 때문입니다. 문화로 여기면 될 갓을….

 

 

“부처님께선 ‘모든 생명을 내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어업 종사자는 부처님을 더 열심히 믿어 잡는 물고기가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발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 고기를 잡는 건 옳지 못합니다. 어린 고기는 잡지 않거나 놓아주면 부처님과 용왕님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11시 30분, 불경을 독송하며 복을 빕니다.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신도들 두 손 모아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염원합니다.

절에서 간절함이 더해집니다.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게 기도발이 닿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발복에는 정성이 깃들어야 효과가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기도하는 자세는 간절한 마음, 참회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어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용왕제에 참석한 사람들의 복을 바라는 마음은 다양합니다.

 

 

“집안이 혈압이 높은 편이라 가족 건강을 빌었습니다." - 김영규
“6개월 전 결혼한 둘째 딸이 임신하길 빌었습니다.” - 오세홍
“첫째 민국이는 짝 만나기, 둘째 지성이는 취직을 빌었어요.” - 김호곤 김경옥 부부
“로또 당첨 빌었어요.” - 김덕양
“남편 사업이 잘 되길 두 손 모아 빌었죠.” - 김증숙

 

 

 

  

 

 

 

“복 더 바라는 거 없냐?”

 

며 물었더니, “없다!”고 합니다.

 

“혼자서 다 바란다면 욕심이라 욕심을 줄였다”더군요.

 

 

 

타인을 위해 바라는 걸 줄이는 것이 상생으로 읽혀 흐뭇했습니다.

 

소원은 건강, 자식, 돈 등이 대부분입니다.

용왕제는 오후 1시에 끝났습니다.

 

 

“세상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고통은 번뇌이며 집착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고통이 사라집니다.”

 

 

“번뇌”마저 “별빛”으로 승화하신, 만해 한용운 스님이 부러울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온 세상에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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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안부문자 홍수 속에 내 마음 사로잡은 문자

희망찬 갑오년 새해 소원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민족의 대 명절 ‘설날’입니다.

 

하여, 복을 비는 안부 문자 메시지가 많습니다.

모임, 카카오 톡, 카카오 스토리,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 등 그야말로 안부 문자 홍수였습니다.

 

 

그 중 정영희 시인이 보낸 문자부터 소개할게요~^^

 

 

 

            새해 인사


                                         정 영 희


      달력 한 장 벗겼더니
      또, 설날입니다.
      오손 도손 밥상머리에 앉아
      희망과 덕담을 나누는
      오붓한 시간,
      올해는 모두의 나이에서
      열 살씩 덜어내어
      청춘과 열정을 불태우는
      역동적인 삶을
      기쁘게 꾸려나가시길
      기원합니다.

 

 

 

 

 

많은 문자 홍수.

 

한 원인은 올해 6ㆍ4 지방선거가 있어 유권자의 표심을 잡으려는 시도지사, 도의원, 시의원 등 정치인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별로 반갑지 않으나 우리를 대신해 나서서 일하겠다는 열정만 보면 반가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마음의 정을 나누는 목사님, 스님, 선배, 후배 등 많은 문자들이 오갔습니다.

 

 

이처럼 두레로 대표되는 우리네 십시일반(十匙一飯) 문화는 서로 복을 빌어주는 배려로 녹아나고 있습니다.

 

 

 

 

 

 

설 전후 온 문자 중 일상적인 몇 개를 소개하지요.

 

 

 

“오늘은 까치설날이고, 내일은 우리 설날입니다. 비로자나불님의 광영이 가득 찬 설 되시고 조상님 차례 잘 모시기 바랍니다.
무리해서 명절 병 얻지 말고 가정 화합하는 좋은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성불사 청강 합장 -

 

 

 

“올해 2014년 청마 해방 70주년 남북 복음 평화통일이 8월 15일에 이루어져서 만주벌판을 마음껏 휘어 달리는 청마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 부탁 드려요!” - 백두대간에서 임혜철 목사 드림 -

 

 

 

“행복한 설날 가족 친지 분들과 따뜻한 마음 많이 나누시고 건강하게 잘 보내요!” - 지방선거 출마 예정자 -

 

 

 

“복 근하신년! 희망찬 갑오년 새해! 소원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 배재만 세배 -

 

 

 

 

 

 

이런 일상적 문자는 고맙습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지요.

많은 문자 중 저의 마음을 움직인, 인상적인 문자 소개합니당~^^

 

 

 

“고마워~, 그대가 내 아우여서… 행복한 설 명절 쇠시게나!“

- 정일봉 배 -

 

 

 

며칠 전, 형님이 보낸 문자에 대한 저의 뒤늦은 게다가 썰렁한 답신입니다. ㅋㅋ~

 

 

 

“미~ 투!!!”

 

 

 

썰렁했는지, 그 형님 아무 반응 없더군요.

 

어쨌거나, 마음에 쏙 와 닿는 이 형님이 보낸 문자를 인용해 몇몇 지인에게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교수(박사)님이 형님이라서… 설 잘 쇠삼!“

 

 

 

그랬는데, 에구 에구~ 다 씹혔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에게 답신이 왔습니다.

 

 

“나야말로 감사하네. 든든한 동생이 되어주어서. 따뜻한 설 명절 보내시게.”

- 최명락 배 -

 

 

 

 

 

저도 저 위에 문자 소개한 형님에게 이렇게 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대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그러나 봅니다!

 

 

문자 홍수 속에 인상적인 문자 남기는 방법도 원만한 인간관계 꾸리는데 도움 될 거 같습니다.

 

 

무튼,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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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이 맞아야 이야기를 한다?'는 사람들에게…

아는 거, 수준, 그리고 소통에 대하여 참회하며

 

 

 

 

 

 

소통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을 찾던 중 떠올린 경우들입니다.

 

 

 

# 1. ‘아는 거’에 대하여

 

 

‘아는 거’.

 

 

이게 늘 말썽입니다.

참 애매합니다. 알긴 아는데 어디까지인지….

 

혹은, 많이? 조금? 얕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아는 만큼 보이는 것. 무엇을 알아감에도 특히 주의할 게 있습니다.

 

 

“궁금증이 생기면 더 공부해서 의문을 풀면 될 텐데 그걸 하기 싫어서 편하게 막 물어본다.”

 

 

모르는 건 물어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부단히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게으르다는 겁니다.

 

왜냐? 노력 끝에 얻는 답은 알찬 지식이 되는 이치입니다.

반면 노력 없이 공짜로 얻는 해답은 쉽게 잊히는 법. 소통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 2. ‘수준’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수준이 맞아야 내가 이야기를 하지. 허허~."

 

 

자기 수준은 높은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다나. 이럴 때 반사적으로 반론이 나옵니다.

 

 

“지 수준은 얼마나 높은데….”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지죠.

사실 어떤 말이든, 쉽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게 말을 비비 꼬니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수준 있게 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격언을 되새길 만합니다.

 

 

남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말하는 사람의 화법이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탓은 않고 상대방 ‘수준’을 탓하며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아둔하고 미련한 중생입니다. 마음자세가 되어야만 말이 통한다는 사실.
 

 


# 3. 소통에 대하여

 

지난 주말, 창원 성불사의 청강스님을 뵈었습니다. 스님 왈,

 

 

“부처님께서도 소통 방법을 강조하셨다. 중생들이 설법을 원해도 아무에게나 설법하지 않으셨다.”

 

 

아~ 그랬구나. 왜 그랬을까?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듣기를 청하고, 원하는 중생에게만 상황에 맞게 설법하셨다.”

 

 

맞다, 맞다. 이유가 뭘까?

 

 

내가 이야기하면 과연 믿을까? 그래서 아무에게나 설법 하시지 않으셨다. ‘네가 물었으니, 내가 답해 줄게.’ 대신 ‘내 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준비가 되었느냐?’라는 말이다.”

 

 

답을 가지고 물으면 상대방의 대답은 하나마나. 그래서 강조하는 것.

 

 

“자신이 몰라서 물었던 것에 답을 주면 그걸 믿어야 하는데 믿지 않는다. 그러면 뭐 하러 해답을 주겠느냐? 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뭐 하려고 묻느냐?”

 

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소통은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것.

 

이를 참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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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창원 성불사 신도들과가을 단풍 산행에서 배운 것

 

 

 

 

 

 

 

 

 

 

“차가 왜 이리 막히지?”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더이다.

‘단풍’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더이다.

도로가 짜증 날 정도이더이다.

 

짜증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 아니더이다.

단풍 구경. 이는 잠시 자연을 잊고 지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더이다.

 

 

“단풍 보러 갈까?”

 

 

단풍 구경은 정해진 시간 속에 잠시의 움직임.

이 시간 요긴하게 쓰는 게 최선이더이다.

 

산 중에서 익어가는 감이 여유를 주더이다.

이렇게  낙남정맥 중 경남 창원과 함안을 아우른 여항산 단풍 나들이를 갔더이다.

 

 

여항산에 퍼질러 앉으려는 단풍이 나그네에게 세 가지 마음 준비를 요구하더이다.

창원 성불사 신도들 착착 마음 준비를 하더이다.

 

산행 길 입구에서의 단체사진이 그것이더이다.

사진 찍을 때의 우왕좌왕과 긴장, 그리고 올바른 몸가짐은 단풍에 요구에 부응하는 몸짓이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는?

 

 

첫째, 자연에 귀의할 마음가짐이더이다.

마음이 열려야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더이다.

 

둘째, 자연을 보는 눈이더이다.

자기 방식대로 감상하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보는 무위자연을 요구하더이다.

 

셋째, 자신을 되돌아보라 하더이다.

지나 온 과거를 잊지 말고, 과거에서  배움을 구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영위하라 하더이다.

 

 

가을 단풍이 나그네에게 요구한 세 가지 방법에 따라 산을 올랐더이다.

그랬더니 나그네가 되더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름에 있어 ‘헉헉’거림은 고단한 육신이 내뱉는 뱃고동 소리로 들리더이다.

항구에 도착을 알리는 굵은 저음의 뱃고동 소리는 마음이 열렸음을 의미하더이다.

 

 

 

 

 

 

 

 

마음이 열린 후, 자연을 보는 눈이 다르더이다!

 

 

스님 : “‘불이(不二)’는 뭔고?”
나그네 : “제 아호(雅號)입니다.”

 

스님 :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무이(無二)도 있는데 왜 부리(不二)로 했을꼬?”
나그네 : “무리(無二)보다 부리(不二)가 좀 더 깊음이 있는 것 같아서요.”

 

스님 : “둘이 아니지만 하나란 의미도 아니야.”
나그네 : “그래도 하나지요.”

 

스님 : “…?”
나그네 : “…!”

 

 

 

 

 

 

 

 

산에 오르자 운해가 피었더이다.

경치가 감탄을 자아내더이다.

 

마음이 열리니 자연을 보는 눈이 정말 다르더이다.

지하세계와 인간계, 천상계 구분이 생기더이다.

세상을 이 삼계로 나누자 구름이 걸린 산봉우리가 산 중의 섬처럼 보이더이다.

 

 

바다 위의 섬이나 운해 위의 섬이나 무에 다를까마는.

섬과 산봉우리는 본디 하나였더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아귀다툼에 몰두하는 바람에 이를 잊고 있었더이다.

천상계와 인간계, 지하세계가 하나일진대 그걸 지나치고 있었더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피안은 나그네에게 삶의 지혜를 안겨 주더이다.

 

그제야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웃음꽃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가져 온 음식들을 공터에서 펼쳤더이다.

저 마다 솜씨를 발휘한 음식을 공양했더이다.

배려와 나눔의 장터이더이다.

 

맛있는 공양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나눠 주신 진리의 법문으로 씹히더이다.

그 씹힘이 어찌나 달달하던지 놀랍더이다.

 

 

 

“보증 때문에 재산 차압당하고 쫄딱 망해 너무 힘들게 살았어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술집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어떤 사람은 이런 일 할 것 같지 않은데 왜 이 일 하냐고 묻기도 했고요.

그 고충을 어찌 말로 다할까. 아이 셋 대학 보내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살만해요. 힘들 때 스님이 중심을 많이 잡아주셨어요.”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에 점차 웃음꽃이 피더이다.

웃음꽃은 홍조로 변해 수줍은 얼굴 단풍으로 변하더이다.

 

그 모습이 자연 단풍보다 더 예쁘더이다. 이 어이 보살이 아니리오!

 

 

 

 

 

 

 

“사진 찍는 표정이 왜 그래요. 내 남편 보듬는다 생각 말고, 마음에 그리던 정든 님 보듬는다 생각하세요.”

 

 

그제야 여인네들 입과 얼굴에서 “호호호~” 웃음이 피어나더이다.

부부,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꼬.

 

그렇지만 현실은 정든 님 어디가고, 웬수만 남았을까.

이래서 산에 오르는 길은 수행 길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죽비 어디 없을꼬?’

 

 

 

“스님, 뭐하세요.”
“니는 보믄 모르나?”

 

 

봐도 보이지 않는 게 중생의 길. 그래서 스님을 따르는 것.

단풍 구경 온 중생들이 버린 마음 속 쓰레기를 줍고 계시더이다.

 

쯔쯔쯔쯔~, 가련한 중생의 길은 언제나 끝날꼬.

 

 

 

 

 

 

 

스님, 내려오던 길에 자작 시조 한 수 읊더이다.

웃음이 배시시 묻은 얼굴에서 승무의 춤사위처럼 나오는 목소리 하나하나가 단풍을 뚝뚝 물들이는 청음의 워낭소리로 들리더이다.

 

 

 

       단 풍


                                  청강스님

 

가을 산 단풍 빛이 몹시도 아름다워
오르는 사람마다 탄성이 잦다마는
아소서, 저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해학이 덕지덕지 묻어나더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

스님에겐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생에겐 가당찮은 깨달음이더이다.

 

 

‘어이~, 동자승아. 어디 죽비 없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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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생일 VS 보통 사람의 생일, 차이는?
동의보감촌 산삼마을의 ‘산삼ㆍ약초 음식촌’

 

 

산삼 비빔밥입니다. 

산삼입니다.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류의태 동상입니다.  

 

 

생일.

 

흔히들 그러죠? '기 빠진 날'이라고...

 

이날은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별히 대접받고 싶은, 은근히 기분 우쭐한 날입니다.

 

행여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왠지 화장실에 갔다가 뒤 닦지 않은 듯 찝찝합니다. 이럴 땐 뒤끝 작렬이지요.

 

그렇담, 속세를 떠난 스님들 생일은 어떻게 지낼까?

 

 

“청강스님이 점심 먹자고 꼭 같이 오라던데….”

 

 

지인의 제안에 따라 산청에 갔습니다.

스님 생일, 그것도 환갑이라며 은근 가길 바라는 터라 못 이긴 척 따라 나섰습니다.

 

속으로 ‘스님도 생일 쉬나? 고거 재밌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산삼 약초 비빔밥입니다. 

산청 한의학박물관 주변의 산책길입니다.

산삼을 보니 식욕이 샘솟았습니다. 

류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몸을 내줬던 해부동굴입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입니다. 

산청 한의학박물관입니다.

 

 

지인과 도착한 경남 산청 동의보감촌의 한의학박물관 주변은 오는 9월에 있을 세계의약엑스포를 앞두고 한창 공사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경남 창원의 성불사 신도 일행을 만났습니다. 먼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한의학 전반에 대해 소개하는 ‘한의학박물관’을 둘러보았지요.

 

그리고 허준이 스승 류의태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해부했던 살신성인의 정신이 깃든 ‘해부 동굴’ 등을 살폈습니다.

 

 

이어 점심 공양을 위해 찾은 곳은 산삼마을<산삼ㆍ약초 음식촌>이었습니다. 산삼을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즐비했습니다. 이거 대박이겠다 싶더라고요.

 

 

산삼 뿌리입니다. 

산삼 약초 음식촌입니다. 

산삼 잎 5개를 확인했습니다. 

산삼 홍보와 메뉴판입니다. 

생일, 그것도 환갑 점심 공양. 부끄러워하면서도 즐거워하시더군요.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이 생일잔치가 뭬야~”

 

 

메뉴판을 살폈습니다.

약초 산삼 비빔밥 10,000, 산삼 삼계탕 15,000, 산삼 흑돼지 두루치기 35,000, 산삼 막걸리 5,000원 등….

 

온통 산삼에만 정신이 집중되었습니다. 사용하는 산삼에 대해 주인장이 그러더군요

 

 

“지리산에서 자란 3년산 산양삼을 쓴다.”

 

 

이거라도 어딥니까, 감지덕지지.

약초 산삼 비빔밥을 시켰습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스님의 환갑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습니다.

 

 

“속세를 떠나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이 생일잔치가 뭬야~. 절에서는 이런 거 업따~ 마. 그런데 환갑잔치라니 더 부끄럽다, 마~.”

 

 

쑥스러워 하는 스님 말을 뒤로 하고, 생일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스님이 촛불을 끔과 동시에 폭죽이 터졌습니다. 속으로 ‘이게 뭐야?’ 했습니다.

 

왜냐면 출가한 스님 생일은 뭔가 색다를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아직 먼 ‘나’임을 확인시키는 거였죠. 부끄러웠습니다.

 

 

밑반찬으로 야채샐러드, 나물 등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약초 산삼 비빔밥이 등장했습니다. 실망이었습니다. 비빔밥에 산삼이 얹어서 나올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비빔밥 그릇을 아무리 살펴도 산삼은커녕 산삼 비슷한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름만 약초 산삼 비빔밥이군!’ 하고 실망했습니다.

 

 

산삼이 얹어지니, 밥 맛이 확 살더군요. 

산삼 뿌리입니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스님. 

산삼 비빔밥에 얹어진 산삼 잎을 보니...

요게 그 산삼이라는 게지...

 

 

산삼, 욕심으로 가득찬 배를 비우게 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산삼이 나왔습니다.

 

비빔밥을 고추장에 비비려는 순간, 산삼을 한 뿌리씩 접시에 담아내 왔더군요.

‘어쭈구리~’ 했습니다. 음식점 주인장이 눈으로 먹는 맛의 재미를 아는 게지요.

음식의 심리전에서 주인이 손님을 이긴 게지요.

 

 

“동의보감촌 산삼마을에서는 농민의 정신과 사랑으로 기른 산청 산양삼으로 건강한 맛을 담아드리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산삼 요리를 소개하는 문구입니다.

이게 아니더라도, 아시다시피 산삼은 천하제일의 약초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던 부처님과 같은 독보적인 의미라고 할까.

 

 

어쨌거나 산삼 잎 5개와 뿌리를 거듭 확인하고 나니, 식욕이 갑자기 용솟았습니다. 산삼을 앞에 두고 나 몰라라 할 이 누가 있겠습니까.

 

 

산삼주입니다. 

 나? 산삼이야...

아련한 연꽃은 정화입니다. 

산삼 막걸리도 있더군요. 5천원이었습니다.

 

 

산삼하면 껌뻑 죽는 게 우리네 현실.

산삼은 노화방지와 수명 연장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밖에도 원기보강, 허약 체질 개선, 심장기능 강화, 혈액순환 촉진, 위장계 질환 완화, 체내 독 제거, 항 스트레스 작용 등 7가지 효능으로 유명합니다.

 

이걸 알기에 허겁지겁 약초 산삼 비빔밥을 먹어 치웠습니다.

 

 

스님 생일을 맞아 호기심에 가졌던 ‘스님도 생일 쉬나? 고거 재밌겠다’란 중생의 일천한 생각은 산삼이란 색다른 맛을 선물했습니다. 이는 특별한 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산삼은 욕심으로 가득찬 배를 비우게 했습니당~^^.

 

 

 입맛 살리는데는 이게 최고?

스님과 환갑 점심 공양을 함께한 일행입니다. 

산삼 비빔밥, 한 번 드셔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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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의 부처님 가르침과 ‘석탄일’ 풍경
대웅전 불사 염원하는 소박한 절집 ‘석탄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석가모니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절집에 갔습니다.

불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가고 싶었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감히 마음 비우고 싶었던 욕망에서 벗어나고픈 어설픈 욕심까지 벗어던지고자 혁명적 사상가이셨던 부처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중생이 마음을 밝혀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

 

 

쌓은 공덕도 없는데 무턱대고 창원의 절집 성불사로 향했습니다.

그 흔한 번듯한 대웅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건물에 불상을 모셔놓은 절집이지만 소박한 마음 나눔이 좋아 끌리는 절집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인간적인 절집이라 좋았습니다. 절집으로 가면서 부처님 말씀을 읊조렸습니다.

 

 

“사람이 귀하거나 천한 것은 태어날 때의 종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한 가르침을 새기면서 세상의 부당함에 항거하고 싶었습니다. 말로는 귀천이 없다지만 갑과 을이 구분되는 현실로 인해 목숨을 던지는 이들의 가득찬 아픔을 잊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타종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사람들...

 

정상식 신도회장의 인사말 

김영규 부회장 인사말 

청강 스님 설법을 진지하게 듣고 잇습니다.

 비옵니다!!!

가건물로 지어진 소박한 절집에 사람이 찾는 이유가 있습니다.

 

 

진짜 부처님 오신 날이 되려면…

 

불기 제2557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회는 타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 독송, 봉축 점등, 찬불가 가창 등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의식이었으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해 복 짓는 기분으로 임했습니다.

 

 

성불사 정상식 신도회장은 봉축 발원문에서 “부처님의 탄신은 진정 더없는 기쁨이요, 희망이며 구원이다”“탄신 그 자체로 저희들은 이미 구원받은 존재이며, 성불을 약속받은 생명으로 무명의 어둠에서 진리의 밝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고 감사하셨습니다.

 

 

최명락 교수(전남대)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가 참다운 부처님 오신 날을 잘 맞이하려면 무엇보다도 일체중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 사람들과 손잡고 함께 부처되는 길로 나서야 한다”면서 “그래야 진짜 부처님 오신 날이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끼리 서로 음해하고 헐뜯을 게 아니라 서로 돕고 나눠야 진정한 부처님 오신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이들을 겁박해 부를 더욱 늘리려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들이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합장하며 간절히 비는 이유는?

 

 

모두들 합장하며 무엇인가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번듯한 대웅전이 없는 절집이어도 무방합니다. 아무려면 어떻냐는 듯 혼신을 다합니다. 부처가 대웅전에만 있지 않고 모두의 가슴 속에 있음을 아는 듯합니다. 이들이 바로 부처 아니겠어요?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절집을 찾은 아이들도 무릎 끓어 절을 올립니다.

물론 아이들은 자신을 낮추는 의식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까지 몸 낮추는 대열에 동참하는 것은 아마 모두들 높은 곳만 향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의지 표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신도들은 진지한 가운데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공허한 세상에서 최소한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몸짓으로도 읽힙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자비와 평화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몸소 실천했던 것들을 닮고자하는 믿음일 것입니다.

 

 

“공양했어요?”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배려가 본래 가고 옴이 없는 부처님이 오신 날이라고 연등을 달아 좋아하는 이유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 세상에 새벽을 가져오신 부처님. 바라옵건데, 아둔한 인간들을 무명의 어둠에서 진리의 밝음으로 눈을 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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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이란 의미
법문 -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팔정도'

 

 

 

 

 

‘새 술은 새 부대에….’

 

 

2013년이 되니 새로운 마음을 담기 위한 노력이 뒤따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노력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다만, ‘도로 아미타불’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년, 마음을 잡기 위해 지인과 6일 경남 창원의 절집 ‘성불사’를 찾았습니다.

 

법문을 들으면 행여 알지 못하던 새로운 길이 보일까, 싶어.

‘마음이 열리면 눈까지 열린다’는 이치를 믿었던 게지요.

 

성불사 청강스님께서 설법에 나섰습니다.

 

 

 

설법 중인 청강 스님.

 

 

“수많은 생명 중, 나무나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행복이지요?”

 

 

스님은 ‘행복론’을 화두로 제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지간에는 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물고기, 개, 돼지, 나무, 잡초 등 많은 미물 가운데에서도 으뜸이라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이 축복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 무엇에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이란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이란 의미입니다. 삶의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비로써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는 고통은 다양할 것입니다.

 

우선 몸의 상태, 얼굴 생김새 등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이기기보다 얼굴까지 고쳐가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요즘입니다.

 

 

정신적 고통은 또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충격.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에서 오는 치떨림.

 

노력한 만큼 얻지 못하는 대가의 부족에서 오는 불만족.

일자리를 구하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밀려나는 좌절에서 오는 상실감 등을 그 어디에서 충족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나로부터 기인한다.’

 

 

욕망의 근원은 자신이라지만 모든 걸 내 탓으로만 돌리기엔 너무 ‘차별’ 혹은 ‘다름’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삶의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에게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법, ‘팔정도’를 안내하셨습니다.

 

 

팔정도(八正道)는 어리석은 중생을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을 말합니다.

 

팔정도는 부처님이 초기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신 행위이자 실천 규범입니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말합니다. 하나씩 풀지요.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정견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사물의 진실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부나 아첨 없이 자신이 느끼는 대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물이나 이치를 바라보는 깊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생각’입니다.

이는 말이나 행동에 앞서 하는 정당한 생각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 속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인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사유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을 버리고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정어(正語)란 ‘바른 말’, ‘곧은 말’, ‘옳은 말’을 뜻합니다.

주어진 일에 있어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한 후에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게지요.

정어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직언(直言)이라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

바른 말은 진실하고 부드러워서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정업(正業)은 ‘바른 신체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행동 하나하나를 바르게 하되,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행동입니다.

 

 

정명(定命)은 ‘바른 생활’입니다.

남을 등쳐먹는 직업이 아닌 올바른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에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입니다.

어떤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꾸준히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잘못된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정념(正念)은 ‘바른 생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항상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입니다.

아무런 번뇌와 망상 없이 맑고 고요한 물과 같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에구머니나, 이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이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팔정도는 <바르게 살라>는 의미를, 단지 여덟 가지로 풀어 헤친 것입니다.

 

고통 많은 삶을 괴로움 없는 즐거움을 찾아 행복해 지는 게 인생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부디, 모두 행복한 한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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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설법 듣고 가슴 뜨끔했던 사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중생아….”

 

 

  

 

 

“지금 들어 가. 들어가라니까.”
“옆에서 잔소리 할 거면 내리던지, 아니면 뒤로 가.”

 

 

‘아뿔싸, 실수 했네’ 싶었습니다.

운전대 잡은 아내의 오금 박는 소리에 입 꼭 다물었습니다.

 

이게 그렇습니다.

 

운전 중 끼어들기를 할지 말지, 시야 확보가 곤란한 버스 및 화물차 뒤를 따라가는 답답함 등이 원인입니다.

 

나름 훈수인데, 아내에게 잔소리일 뿐입니다.

 

 

왜 그럴까?

운전석 옆에 앉아 입 다물고 조용하면 좋으련만, 한 마디씩 건네야 직성이 풀립니다. 나쁜 습관입니다.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어야 멈춥니다. 저도 고쳐야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아내와 창원 성불사에 갔습니다.

혼자 다니던 절집에 처음으로 아내와 같이 간 것입니다.

 

남편이 다니는 흔적을 알려줘야 그나마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어섭니다.

중년에 기죽어 사는 남편의 비애 혹은 사랑의 몸짓인 셈입니다.

 

법당에 앉았습니다.

 

 

설법 중인 성불사 청강스님입니다.

 

 

 

 

스님의 설법 듣고 가슴 뜨끔했던 사연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아이고 저 원수’ 그러죠?”

 

 

청강스님 말씀에 듣던 내 가슴도 뜨끔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는 긍정과 부정의 경계에 있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일순간 지었습니다. 나도 아내에게 원수일까?

 

 

“남편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남편이 늦게 온다고 저 원수? 그러지 말고, 남편을 부처님처럼 귀하게 여기면서 칭찬과 격려를 하면 남편이 집에 빨리 들어옵니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나옵니다. 나를 낮추면 해결됩니다. 이게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맞아, 그래야지’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잊고 사는 게 중생입니다. 설법 후,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이 어찌 그리 내 마음을 잘 알까. 당신이 늦게 들어오면 아이고 저 원수 그러는데…. 지금부터 당신을 부처님으로 알아야겠네.”

 

 

아내는 그러면서 “아이고 내 부처님”이라며 안을 듯 달려들었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원수였다는 것을. 지금껏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아니, 지금이나마 알아서 다행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던 나를 이제나마 알게 되었으니.

 

 

아내의 확인은 계속되었습니다.

 

 

작은 음악회도 열렸습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중생아….”

 

공양시간, 스님에게 아내를 소개했습니다.

아내는 절 법당에 들어 온 것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설법 들은 소감을 말했습니다. 

 

 

“스님, 꼭 저에게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옵니까? 부처님 하세요.”
“알겠습니다. ‘남편=부처님’ 하고 살겠습니다.”

 

 

짧게 오간 말 속에 아내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몇 마디에 하고 싶어도 다 쏟아내지 못할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애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남편을 부처님으로 알고 산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옆에서 스님에게 한 마디 건넸습니다.

 

 

“스님, 남편들을 바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립니까?”
“그게 아니다. 남자들 편들어 준거다.”


“뭐가 편입니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중생아….”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상냥해지고, 살가워졌습니다. 함께 다닌 덕분입니다.

또한 남편에 대한 기대치는 줄었을망정, 가방 하나 메고 혼자 훌쩍 떠나던 남편의 흔적과 체취를 맡은 안도감도 있었을 겁니다.

 

 

삶이 다 그런 것을….

 

 

삶이 번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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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등 지인과 함께 한 마산 적석산 등반기
“저렇게 편한 얼굴로 살면 얼마나 좋겠어!” 

 

 

 

적석산에서 본 풍경입니다.

적석산 입구 저수지입니다.

적석산 초입입니다.

산행은 땀을 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질 체력의 한계를 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게 산행입니다.

가능한 일주일에 한 차례는 꼭 오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낭패의 끝은 저질 체력뿐임을 뻔히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말 창원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성불사 청강스님 등 지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 스님이 반가운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산에 갈까?”

 

 

너무나 반가운 소리라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렇잖아도 산행 하면 좋겠다는 생각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룰루랄라~, 산행 길에 나섰습니다. 스님께서 중간에 한 보살을 태웠습니다.

 

 

“김밥 샀어?”
“예. 넉넉히 샀습니다.”

 

 

오전임에도 차량과 사람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창원 적석산은 도심과 가깝고 짧은 시간에 등산이 가능하고 땀까지 쭉 뺄 수 있어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여섯 명이 적석산 입구에서 칡즙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킨 후 산에 올랐습니다.

 

 

중턱에서 본 자연 풍경입니다.

이런 풍광을 즐기는 것 또한 산행의 묘미입니다.

적석산 구름다리입니다.

정상에서 아이스크림을 문 일행입니다.

 

 

산행 길에서 가장 우스운 질문은 무엇일까?

 

 

“적석산은 왼쪽으로 오르면 가파르고 오른쪽은 여유롭게 오를 수 있어.”

 

저질 체력을 간파한 스님께서 손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적석산의 맑은 공기가 폐로 들어가자 심장박동이 경쾌합니다.

새들의 지저귐이 상쾌한 기분을 안겨줍니다. 편안한 산행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그렇다고 우습게 여기면 안 됩니다.

 

 

“정상까지 얼마나 가야 하죠?”

 

 

스님께 질문하고 아차 싶었습니다. 산행에서 가장 우스운 질문입니다.

답은 뻔합니다. 

 

“조금만 가면 돼. 다 왔어”

“5분만 오르면 돼”

 

라는 두 가지가 대부분입니다.

 

스님께서 배시시 웃으시며 역시 “조금만 가면 돼”라고 합니다.

이처럼 속으면서 오르는 게 산행길입니다.

 

적석산(497m)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경남 고성군 화화면에 걸쳐 있습니다.

적석산은 이름대로 평평한 바위들을 쌓아 올린 바위산입니다.

'쌓을 적(積)' 자를 써서 '적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5년 세운 구름다리, 일명 출렁다리가 눈길을 끕니다.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요.…”

 

 

산행 길에서는 삶에 대한 이야기도 술술 나옵니다.

삶이 편안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등산길처럼 삶도 굴곡이 있어야 사는 맛이 있는 이치입니다.

 

 

땀의 의미는...

산행은 삶을 돌아보는 길입니다.

30년 지기, 우정 영원하길...

 

 

“저렇게 편한 얼굴로 살면 얼마나 좋겠어!” 

 

정상 인근에 다다르자 아이스크림으로 갈증을 푸는 등산객들이 눈에 띱니다.

 

“정상에 아이스께끼 장사가 있다”며 친절하게 가격까지 “1,500원”이라고 알려줍니다. 땀 흘린 후 먹는 아이스크림 맛은 먹어본 사람들만 알겠죠?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남들이 먹는 걸 보니 입맛이 당기나 봅니다. 1시간여 만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질펀하게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어느 새 지인이 아이스크림을 건넵니다.

평상 시 같으면 먹지 않을 텐데, 산 정상이라 받아들어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꿀맛입니다.

 

소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김밥과 떡, 막걸리, 등산객이 건네 준 감 등으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배가 부르니 생각이 한결 여유롭습니다. 청강스님이 한 마디 합니다.

 

 

“땀 흘린 사람들 표정 좀 봐. 산에서는 저렇게 편안하고 자비로운데, 세상에서는 왜 그리 인상을 쓰고 사는지…. 저렇게 편한 얼굴로 살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습니다. 편안한 표정으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삶이 편하지 않으니 얼굴에 수심이 끼는 거겠지요.

 

산행 길은 근심 걱정을 잊기 위함 아니겠어요?

 

 

풍경이 아름답더군요.

좁은 바위 틈 사이길이 지루함을 덜었습니다.

단풍이 들면 더 멋있을 듯합니다.

정상에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꽤 가파랐습니다. 다리가 후덜덜~^^

적석산 산행에 함께 한 일행입니다.

엥 코뿔소를 닮은 나무입니다.

요게 코불소를 닮았다네요~^^

돌을 쌓은 듯하다며 지은 적석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적석산에서 본 다도해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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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둘러보기] 경남 창원 성불사 점안식
 

점안식 전 가려진 불상과 후불탱화.

 

 

불상은 만들면 그저 불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불상도 의식을 통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지라 불교에는 관심이 없어 마음으로 보지 못한 탓입니다.

그저 우리네 문화인 것을….

 


점안식이 있던 일요일 새벽예불 모습입니다.

점안식에서 혜안 등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성불사는 지금은 달랑 가건물 한채였습니다만...

 

불상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부처로 탄생시키는 ‘점안식’을 가게 된 건 스님을 지인으로 둔 때문이었습니다.

청강 스님. 그는 해인사, 통도사, 무위사 등을 거쳐 새로운 절집을 창건하는 불사를 진행 중입니다.

점안식(點眼式)은 말 그대로 불상을 조각하거나 그린 다음 불상의 눈에 붓으로 동자를 찍는 의식을 말하며, 개안식이라고도 합니다.

새로 조성한 불상 등에 경전과 다라니 등의 복장을 넣고 나면 불상의 조성은 일단 완성됩니다.

점안식은 여기에 공양 등의 의식을 통해 부처의 영을 맞이하는 개안 의식입니다.
이는 부처가 가진 32상과 80종호의 장엄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눈을 그리기 전에 불상의 눈이 육안ㆍ천안ㆍ혜안ㆍ법안ㆍ불안ㆍ십안 등의 성취를 기원하고 신비력의 효험 등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라밀예술단의 지우스님과 시용스님이 점안의식 중입니다.

점안의식. 

드디어 불상을 덮었던 가리개가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답하고 있습니다. 

법문 중인 해인사 도흥스님.

불상과 탱화를 감싸던 천들이 걷혀진 모습. 

신심을 얻기 위한 마음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상대방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합니다.

또한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을 ‘옳다’, ‘그르다’, ‘예쁘다’, ‘밉다’ 등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이러한 인간의 분별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행위가 점안식일 것입니다.

 

청강 스님을 만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송광사, 선암사, 향일암, 문수사, 화엄사, 강천사, 쌍계사, 표충사, 만어사, 해인사, 운문사 등 남녘에서 비교적 크다고 알려진 절집만 다녔습니다.

 

하여, 새로운 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문외한이었습니다.

 

 

 점안식이 끝이나자 복을 기원합니다.

 물을 뿌려 효엄을 나누고 있습니다.

 점안 불공 중인 청강스님.

류지영국악원 원장과 문하생의 회심곡 공연입니다.

은송무용학원 김태순 원장 일행의 진혼무, 살풀이 공연도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인연 공덕으로 인해 창건 중인 절집 ‘성불사’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일요일 점안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절집 창건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원효대사 등 큰 스님들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부처에 대한 가득한 열정이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불사는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절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달랑 가건물 한 채만을 지어놓은 상태입니다. 차츰 절집으로 위용을 갖추겠지요.

불교에 귀의한 그가 신도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할 업보(?)요, 공덕인 셈입니다.

성불사에 갔더니 불상과 보살, 탱화 등이 천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가려진 천은 점안식이 끝난 후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안식은 개회사, 삼귀의례, 반야심경 낭송, 찬불가, 발원문, 인사말, 봉축사, 법문, 살풀이, 산회가, 폐회, 점안 불공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점안식에는 아이도 참여했더군요.

부처가 걸었던 정법의 길을 그리는 사람들.

 

점안 법회는 우리들 가슴속에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특히 고통 속에 소외받는 이웃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나누고자 합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수많은 이들이 반목과 질시, 전쟁과 테러로 무지의 늪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생을 정법의 길로 인도하시길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모두들 성불하시길….



점안식 후 생명력을 받은 부처님 등 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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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phism-travel.tistory.com BlogIcon 무념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점안식이란 것이 있었군요~ 좋은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

    2011.11.08 14: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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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인생사가 다 '섬'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알콩달콩 풀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론 진짜 섬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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